시는, 우리가 잊고 살기 쉽지만 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노래한다.
시를 읽는 순간은 인생의 쉼표를 찍는 순간과 같다.
내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가치에 대해, 의미에 대해
곱씹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를 읽는 마음은 겸허해 지나 보다.
함정 속의 함정
김상미
갑자기 유년의 뜨락이 그리워져 앨범을 뒤지는 건 함정입니다.
지나간 시간에 새 옷을 입혀 함께 외출하는 것도 함정입니다.
책꽂이에 꽂힌 당신의 시집을 빼내 읽지도 않고 다시 꽂는 것도 함정입니다.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에 마음이 울컥해져 창문을 활짝 여는 것도 함정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실망했다고 말할 때마다 먹은 나이를 게워내는 것도 함정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너무나 잘 읽으면서도 모르는 척 침묵하는 것도 함정입니다.
들어줄 귀가 없고, 보아줄 눈이 없고, 품어줄 가슴이 없다면 아무도 사귀지 마십시오. 외로움 때문에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함정입니다.
아무리 친한 사람도 당신의 정신적 고통은 결코 함께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슬픔만을 조금 나눠 가질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 많은 걸 요구하는 건 함정입니다.
당신의 마음에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것도 함정입니다.
함정인 줄 알면서 그곳에 아낌없이 뇌를 빠뜨리는 것도 함정입니다.
함정들로 가득 찬 당신 머리 속 서재에 앉아 좌절한 펜으로 쓰는 사랑과 미움, 파멸의 서(書) 또한 함정입니다.
그렇게 당신과 나, 우리 모두는 그 꽃잎 위에 앉아 있습니다. 함정 속의 함정! 그 외 달리 무엇을 꽃다운 인생이라 부르겠습니까? 천변지이(天變地異)가 모두 그 꽃잎 하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얼음계곡
박형준
내 생이 저렇게 일시에 얼어붙을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무늬를 내부에 간직할 수 있을까
사춘기 시절 숲으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갈래로 나눠졌다
한 길은 오솔길로 통하고
한 길은 가파른 얼음계곡으로 이어져 있었다
오솔길엔 나뭇잎이 가득했다
눈 더미 아래 하얀 알들을 감추고 실뿌리들이 꿈을 꾸고 있었다
그늘 진 오솔길로 접어들면
나는 정박(碇泊)의 거대한 나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뿌리의 힘이 유혹하며 대지에 붙박으려 하였다
나는 오솔길과 얼음계곡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발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속엔 이미 신기루가 피어올랐다
얼음 속에 결빙된 무늬들이 햇빛에 날개처럼 부서졌다
나는 얼음계곡을 올라가며 정을 박고 싶었다
날개들을 캐내고 싶었다
산정(山頂)의 얼음묘지에 이르러
나는 얼음 속에 내 삶을 결박하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오솔길과 얼음계곡 어디로도 가지 못했다
내게는 뺨을 발그랗게 간지르는 미풍과 햇빛에 반사되는 창백한 결빙이 번갈아 나타났다
어느 길도 선택하지 못했기에
내게서는 나뭇잎도 피어오르지 않았고
강파른 산정을 재겨 딛고서,
얼음 속 날개 한벌 꺼내지 못했다
백색의 신기루만 부서지고 있었다
다만 나는 한때 인생의 두 갈래 길에 서 있은 적이 있었다고
그때 이미 내 가슴은 부패하고 있었고,
갈림길의 응달에 녹아가는 눈더미 속에서
구더기때가 전신에 알을 낳고 있었다고,
이른 봄의 나비떼가 얼어죽은 지
꽤 오래된 노인의 가슴에서 날아올랐다고
무심코 그 길을 지나가던 등산객의 방관을 조바심치며 기다리는,
중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빗소리 듣는 동안
안도현
1970년대 편물점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 척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맛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 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삶은 때로 머리채를 휘어 잡히기도 하였으나
술상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시간보다
목 빼고 빗줄기처럼 우는 날이 많았으나
빗소리 듣는 동안......
연못물은 젖이 불어
이 세상 들녘을 다 먹이고도 남았다네
미루나무 같은 내 장딴지에도 그냥, 살이 올랐다네
추운 것들과 함께
이기철
지고 가기엔 벅찬 것이 삶일지라도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삶이다
천인절벽 끝에서 문득 뒤돌아보는 망아지처럼
건너온 세월, 그 물살들 헤어본다 한들
누가 제 버린 발자국, 쓰린 수저의 날들을
다 기억할 수 있는가
독충이 빨아먹어도 아직 수액은 남아 나무는 푸르다
누구의 생이든 생은 그런 것이다
세월이 할 수 있는 일은
노오란 새의 부리를 검게 만드는 일뿐
상처가 없으면 언제 삶이 화끈거리리
지나와 보면 우리가 그토록 힐난하던 시대도
수레바퀴 같은 사회도 마침내 사랑하게 된다
계절을 이긴 나무들에게
너도 아프냐고 물으면
지는 잎이 파문으로 대답한다
너무 오래 내려다보아 등이 굽은 저녁이
지붕 위에 내려와 있다
여기저기 켜지는 불빛
세상의 온돌들이 더워지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그 안에서 생을 마감할 사람들도
오늘 늦가을 지붕을 인다
눈길 간다
이사라
여기 누워 있는 이 무늬 참 좋죠?
파도의 마지막 자락과 모래사장이 만나서 만든 상형문자
참 좋죠?
하늘과 땅 사이 그 절벽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의 미소
모든 끝물
참 달죠?
모든 문지방
인간
참 끌리죠?
대웅전과 명부전 사잇길
참 으스스 솜털 돋죠?
누옥(陋屋)과 기념관 사이의 시간
참 살 만하죠?
우물과 호주머니, 갯벌, 톨게이트, 결로(結露)현상, 유리창
이 모든, 사이의 것들
부드러운 경계들
이름이 없어지지 않고 이름이 더 두드러지고야 마는 것들
참 좋죠?
나는 당신과 인연으로
참,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이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