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지만 좋아하는만큼 안되는 일 그래도 하고 싶은 일

2020. 3. 26. 10:54똑똑똑: 어바웃지랭

 

:글을 쓰는 일, 그리고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

 

 

ⓒ정오의달

 

초등학생 때부터 써왔던 일기를 지금까지 계속 보관하고 있다.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건 당연하게도 학교에서 숙제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개학이 코 앞에 다가오면 밀린 일기를 쓰느라 기억력을 짜내곤 했다. 때로는 얼른 해치우고 싶은 골칫덩어리 숙제였지만 사실은 하루에 한 편씩 쓰는 일기를 나는 꽤 즐거워했다. 내가 갖고 있는 나의 일기장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된다. 그 당시 유행했고 내가 애정 했던 영아트 캐릭터가 그려진 아기자기한 일기장 속에는 초등학교 3학년이 쓴 거 맞나?라고 생각할 만큼의 긴 분량의 글이 적혀있었다. 그 당시 일기는 매일 써야 했던 숙제였던 건지 일기를 쓴 날은 하루 걸러 하루 꼴로 나왔다. 나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가 기억이 돌아온 사람처럼 전혀 기억나지 않던 내 과거의 소소한 일상의 조각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일기를 읽는 것은 10살의 나, 11살의 나, 12살의 나, 13살의 나를 복원하는 과정이었다. 매우, 설레는 일이었다.

 

나는 직업의 특성상 초등학생 아이들을 많이 접하게 되고 아이들의 다양한 글쓰기 수준도 경험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작년에 가르쳤던 2학년 한 아이는 정말 감각적이고 시적인 표현을 잘 써서 '우리 반 시인'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그런 특별한 아이들에 비하면 나는 그 정도의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쓰진 못했다. 그건 지금까지 이어져서 나는 지금도 동시대의 수많은 특출 난 글쟁이들에 비하면 많이 부끄러운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내가 즐겁게 글을 써 내려가 일기장을 빽빽이 채운 것처럼 지금의 나도 내 앞에 펼쳐진 여백이 두렵기보다는 설레고, 이 여백을 채워나가는 일이 즐겁다. 그런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일은 내가 쓴 글에서 스스로 반짝이는 특별함을 발견할 때가 아닐까 한다. 사람들이 그런 평가를 내려준다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사실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새 타인의 평가와 자신의 평가라는 도마 위에 항상 올라가 난도질당하는 내 글은 한없이 작아지고 작아져서 어느 누구도 이 글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웠고 그래서 더 이상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블로그를 닫았다.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아닌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손글씨로 자유롭게 적는 일기장은 그래도 살아있었다. 초등학생 때는 거의 매일 일기를 썼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나는 더 이상 숙제에 '일기 쓰기'는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이제는 숙제가 아니기에 평범한 날들에도 어떻게든 사건을 떠올려 쓰는 일기는 아니었다. 특별한 사건이 내 마음을 흔드는 날, 내 마음을 토해내고 정돈되지 않은 생각을 정리해내기 위해 일기를 쓰게 되었다. 그래서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졸음과 함께 사라져 버린 일기도 다수. 그랬던 나의 자발적 일기 쓰기도 30대에 접어들며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 까닭을 짚어보면 아마도 나는 순탄하게 연애를 했고, 꽤 많은 목록의 해야 할 일들을 거쳐 결혼을 했으며, 새로운 가정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썼기 때문인 듯싶다. 그렇게 내 일상에서 글 쓰는 행위는 사라지게 되었다. 

 

글 쓰는 일이 사라졌다고 내 삶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건 없다.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살아가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 안에서 나는 깨닫고, 변화하고, 같은 삶을 유지하거나 다른 삶을 시도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지만 조금은 더 나아진 것 같은 오늘- 조금은 자란 것 같은 나를 경험한다. 글쓰기가 없다고 해서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그런 기억되지 못하는 날들이 쌓이고 쌓여가다보면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어떻게 이 길을 걸어오게 된 것일까, 기억하고 싶어 지는 날이 찾아온다. 하지만 생생하게 그날을 기억할 수 있는 길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뒤여서 나는 아끼던 삶의 한 조각을 잃어버린 기분에 조금 슬퍼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사실은 글쓰기가 작은 조각이 아니라 내가 너무도 소중하게 여기던 보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커다란 상실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비록 내 글이 흑역사로 남을지라도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일도 비슷한 일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혐오하지 않고 혹은 자만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과하게 높이거나, 열등하게 낮춰보지 않으시고 보시기에 "좋다" 하신 것처럼 나도 나를 "좋다"라고 담백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내 인생 과업이다. 그래도 내가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 것처럼 나는 나를 좋아하는 만큼 두려워하지 않고 나의 단점과 장점과 평범함과 특별함 모두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싶어 졌다. 나는 나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누구보다도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이 무색하게 나는 너무도 작은 일에서부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계산적인 게 싫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계산을 마친 내 머릿속을 자각해야 할 때라든가, 따뜻하고 수용의 폭이 넓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사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대화하고 관계를 맺기보단 선을 긋는 걸 더 선호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나를 있는 힘껏 밀어내고 싶어 진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결국 나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나를 부정한 채로 나는 나라는 존재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솔직한 글쓰기를 하고 싶다. 나를 솔직하게 내보이고,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경험하고 싶다. 꽤 그럴듯한 착하고 괜찮은 나만 내가 아니라 계산적이고 부족한 나도 나라는 걸. 그리고 나는 그런 내가 "좋다"라고 담백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진심으로 내가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가고 싶다. 해피엔딩이 아니라도 괜찮다. 이제 나에겐 내가 그런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니까.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