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봄 제주여행 단상

2022. 4. 21. 15:28똑똑똑: 어바웃지랭/단상

사람 때문에 속 끓이고, 사람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제주 여행을 오기 며칠 전 엄마와 점심 식사를 했다. 엄마는 며칠 전 모임에서 만난 친구분이 코로나에 걸리셨다고 했다. 그럼 나를 만나지 말았어야지 왜 말도 안했냐고 엄마를 타박했다. 그럼에도 우린 함께 점심을 먹었고, 디저트도 함께 먹었다. 날이 쌀쌀했고, 엄마는 몸이 좀 으슬으슬하니 어서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엔 나는 아빠랑 저녁을 먹었다. 엄마는 볼 일이 있어서 함께하지 못하는 일정이었다. 아빠랑 식당을 향해 가는 도중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집에 자가진단 키트 어딨는지 아느냐고. 나는 결혼한지 5년 차고, 더 이상 친정에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모른다. 엄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엄마는 자가진단 키트가 사라졌다며 하나 사달라고 했다. 몸이 아프다고. 아무래도 코로나에 걸린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자가진단 키트와 코로나 가정상비약 세트를 사가지고 엄마한테 갔다. 자가진단을 하니 몇 초만에 기준선과 함께 코로나 양성 줄이 하나 더 떠올랐다. 몇 분이 지나자 무엇이 기준선이고 무엇이 양성을 나타내는 선인지 구분이 안갈만큼 선명한 두 개의 선이 눈 앞에 보였다. 자가진단키트가 "코로나!!"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우리 가족 중 처음으로 엄마가 코로나에 걸린 것이다. 

 

나는 엄마와 점심을 먹었고, 엄마와 살을 부대끼며 생활을 공유하는 아빠와 저녁을 먹었다. 게다가 밤부터 설사며 미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코로나 의심 증상으로 볼 수 있는 증상이었다. 몸 안에 있는 것들을 죄다 비워냈다. 자가진단을 실시했다. 음성이 나왔다. 하지만 자가진단의 신뢰도가 낮은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 자가진단키트는 양성을 양성이라 확인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찝찝한 마음으로 남편과 각방을 쓰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몸이 좋지 않았다. 전날 폭풍설사로 모두 비워낸 덕에 더 이상 설사를 하진 않았지만 열은 조금 더 올랐다. 집 앞에 있는 병원에 가서 신속항원검사를 실시했다. 양성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늘 1:1 필라테스 예약도 되어 있고, 다음날 토요일엔 결혼식 1건, 친구의 부탁으로 사진 기사 역할을 맡은 친구 딸의 두 돌 생파,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모이는 44모임까지 무려 3개의 약속이 연달아 잡혀 있었다. 그 다음날 일요일에도 과동기 결혼식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과동기 모임이라 육아 중인 친구들은 흥분상태였다. 결혼식 3시간 전에 모여서 먼저 입을 털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4박 5일의 제주여행. 빼곡한 일정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 양성이면 모든 일이 깔끔하게 리셋이다. 곤란한 일이었다. 

 

15분 후. "00님, 진찰실로 들어오세요." 진찰실로 들어가 의사 선생님 앞에 앉았다. 양성 선고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왠걸, 음성이란다. 하지만 몸이 아픈데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장염 증상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장염 약을 지어주셨다. 장염 약을 먹고도 상태가 좋아지지 않으면 다음날 다시 코로나 검사를 받으라고 하셨다. 100% 음성으로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나는 몸이 아팠고, 오늘 신속항원검사에서 음성이 나오긴 했지만 양성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필라테스 학원에 연락을 했다. 당일 취소는 원칙적으론 불가능하지만, 오늘 같은 내가 밀접접촉자고 양성이 될 수도 있는 증상이 있는 상황이니 차감 없이 취소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양성이 될 경우 다른 회원들과 강사님들께도 피해를 끼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학원에서는 지금 방역 규정으로는 밀접 접촉이고 증상이 있어도 법적으로 따로 규제하는게 없기 때문에 양성 판정을 받지 않은이상 당일 취소는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정부 방역 지침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혹시 양성일 경우엔 다른 사람들은 위험에 노출되게 되는 건데 학원의 내부 규정이 회원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문제 제기를 했지만 학원 측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문제라고 느끼는 것이 있으면 나는 그냥 넘어가기 보다 문제 제기를 하는 편이다. 문제가 있으면 고쳐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왔고 그래서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그 문제를 그냥 방치하고 회피하면 분노가 차올랐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옳은 일이라고 모두가 쌍수들고 환영하며 그렇게 하려고 하진 않는 법이다. '옳은 일'의 스펙트럼이 넓은 문제도 있었다.  A 입장에서 생각하면 A가 옳은데, B 입장에서 생각하면 B가 옳은 것 같기도 했다. 

 

필라테스 학원은 어떤가. 코로나 이후 유증상인 회원들이 당일 취소를 하다보니 당일 취소로 인한 손해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방역 지침이 완화되자마자 당일 취소로 인한 손해를 막기 위해 '양성 판정 이외의 당일 취소는 불가'라는 원칙을 세웠다. 그 입장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게 최선인지는 모르겠다. 회원들이 무분별하게 유증상을 이용하는 것이 걱정되었을까. 개별적인 회원 특성과 상황을 고려할 순 없었을까. 그 애매한 지점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게 골치 아프니 방역 상으로 구멍이 생기는 걸 방관한 것이다. 회원들의 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운동학원이 건강에 해가 되는 상황을 두고 본다는 게 맞는 지 모르겠다. 

 

내가 다니는 필라테스 학원이 어떤 학원인지 알게 된 이상 개인적으로 이 학원에 재등록은 하지 않을 거지만, 이 일로 내 마음은 며칠 간 상당히 불편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사람이 싫어진다. 잘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도 실망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차갑게 싫은 소리를 하는 나도 스스로나 왜 이렇게 유난인가 싶어서 싫어진다. 아직도 남은 수업 일을 채우기 위해 학원에 가서 어색하게 얼굴을 맞대야 하는 사람들 사이의 부대낌이 싫어진다. 

 

이건 하나의 사건이지만, 사실 요새 인터넷에 접속만 하면 뜨는 기사들을 보면 사람이 싫어지는 일은 차고 넘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과 그 혼돈한 틈을 타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면면을 볼 때.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들을 볼 때. 댓글 창에서 벌어지는 여성을 향한 비하와 조롱섞인 말들을 볼 때. 지구 상에 살아가는 생명체 중 최악은 사람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이 꼴보기 싫어서 뉴스도 외면한지 꽤 됐다. 지긋지긋한 인간들. 알아서들 잘 살라고 그래. 나는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아주 일부의 일들만 보고도 인간에 대한 환멸이 판치는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모든 아픔을, 모든 혐오를 다 보시면서도 어떻게 사람을 사랑하실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요새 나의 기도 제목은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세요'다. 

 

다행히 나는 장염 약을 먹고 몸이 회복되었고, 이후의 자가진단에서도 음성이 나왔다. 계획대로 제주 여행을 떠났다. 제주 여행 첫 날 저녁은 체험단에서 제공하는 저녁을 먹었다. 베트남 쌀국수 집이었는데, 내가 간 날이 월요일이어서 그런지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꽤 넓은 홀에서 홀로 널찍한 자리에 앉아 3만원어치 음식을 시켜서 먹었다. 주인 부부는 정말 친절하셨다. 처음엔 살짝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어색함도 사라졌다. 시원한 맥주에 바삭한 반쎄오는 환상의 궁합이었다. 한국에서 바삭한 반쎄오 먹기 하늘의 별 따기 같은 느낌이었는데 사장님의 열정으로 바삭함을 흡사하게 재현한 반쎄오였다. 사장님께선 이것도 맛보라며 시키지 않은 음식도 더 내어주셨다. 음식으로도 배를 채우고, 사장님 부부의 다정한 대화로 마음을 채웠다. 혼자 갔는데 한 시간 넘게 식사를 하고 나왔다. "덕분에 정말 잘 먹고 혼자 왔는데 대화하면 즐겁게 식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두 손 모아 인사하고 음식점을 나섰다. 사장님 부부도 웃는 얼굴로 배웅해주셨다.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졌다. 마음도 하늘로 동동 날아올랐다. 행복한 밤이었다.

 

퍼틴 제주연동점

 

다음 날 아침은 숙소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었다. 이번에 묵은 숙소는 조식이 맛있기로 이름난 곳이다. 사장님께서 새벽부터 정성들여 솥밥을 지으시고 정갈한 일본식 제철 반찬들을 내신다. 내가 먹은 날은 제철 두릅 솥밥, 방울 양배추와 소라 두릅이 들어간 된장국, 생선구이, 일본식 톳 조림, 제주 생고사리 무침, 멸치볶음, 토마토 양파 절임, 당근채 절임이 나왔다. 이번 숙소도 공교롭게도 월요일 숙박이라 그런가 나 혼자 묵었다. 나 혼자를 위해 차리신 맛있는 아침 식사가 더 황송했다. 아침을 먹으며 사장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사장님께서는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생활하시는 분이라 제주 뿐 아니라 서울의 좋은 정보들도 많이 알고 계셨다. 제주에 와서 서울 정보를 얻을 줄이야. 제주에 관련된 정보는 동네 언니에게 얻는 정보까지도 - 무려 어제 동네 언니따라 다녀온 명상 클래스까지도- 알려주셔서 내가 인터넷 검색으론 알지 못했을 꿀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진본이 지금 제주국립박물관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덕분에 나도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사장님께서 내려 주신 후식 커피까지 야무지게 마신 뒤에 체크아웃을 했다. 매일 오는 손님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해야할 수도 있는데. 지겨울 수도 있는데. 사장님의 꾸준한 호의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꼬이 조식
추사 김정희 세한도 진본

 

종달리로 이동해서 일 박을 했다. 종달리는 동네에 구경할 거리가 많은 곳이다. 지난 여행에서 잠시 들렸다가 좋아서 다음엔 꼭 일박을 해야지, 란 마음을 품었고 이번 여행에서 일박을 했다. 종달리에선 지미봉이란 오름에 오르면 성산일출봉, 우도가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종달리 마을에는 옛 소금밭이 있던 밭에는 억새가 한가득이라 장관이고, 마을 안에 철새도래지 같은 연못(?)도 있다. 목이 길고 물음표 모양으로 구부러진 하얀 새가 여럿이라 깜짝 놀랐다. 꼼짝않고 한 자리에 서 있다가 순간적으로 날쌔게 물 속으로 긴 목을 집어 넣으면 사냥하는 거다. 사냥에 성공하면 부리에 물고기가 걸려 나온다. 그 옆에선 오리도 오리궁둥이를 하늘로 치솟으며 물질을 한다. 새들만 구경해도 시간이 잘 간다. 마을 안에는 '소심한 책방'이라는 좋은 책방도 있고, 무거운 책을 사는 게 부담스러운 여행자들을 위한 '종달리 746'이란 좋은 북카페도 있다. 마을 골목 골목에는 귀여운 가게들도 많다. 그 중 '쇼룸오구팔'은 직접 그린 일러스트로 만든 상품들을 파는 곳인데 들어서니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 금방 오기에는 먼 곳에 갔다며 물건을 구매하면 계좌로 입금해 달라고 계좌번호만 남겨져있다. 이렇게 장사해도 괜찮은 거야? 아무리 대한민국이 치안이 좋다곤 해도 이렇게까지 믿을 판인가 싶어서 놀랍다. 제주의 계절을 담은 일러스트 엽서를 3장 고르고 계좌로 돈을 부쳤다. 누군가가 믿어줬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양심이었다.

종달리 지미봉에 오르면 보이는 풍경
새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쇼룸오구팔

 

종달리에서 다음 목적지는 우도였다. 우도에선 4인실 게스트하우스에 묵었다. 게스트하우스는 만실로 보였고 저녁 식탁에는 저녁을 먹기 위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왜 이렇게 다들 우도까지 와서 컵라면을 먹나 했더니 식당에서 재료소진으로 헛걸음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날 우도 초등학교에서 운동회인가 행사를 했고 그래서 동네 사람들도 음식점에 많이 갔다고 한다. 거기다 관광버스도 여러 대 왔다갔고.)나도 그런 사람 중 1인이긴 했다.  나는 편의점에서 저녁거리로 비비고 냉동 김치치즈주먹밥(충격적이게도 냉장 삼각김밥은 매일 들어오지 않고 들어오는 날이 정해져 있다..!)과 반숙란, 요거트, 맥주를 샀다. 숙소로 들고 오기도 전에 편의점 앞 바다에서 맥주랑 반숙란은 까고 말았다. 바다에서 맥주 마시는 거 못참지. 그래서 주먹밥이랑 요거트만 들고 숙소로 들어왔다. 그렇게 사람들이 삼삼오오 식탁에 둘러앉았다. 먼저 앉아있던 올레길 걷는 모녀는 컵라면에 맥주 한 잔을 하고 있었다. 뒤이어 온 사람들도 컵라면 혹은 맥주와 안주거리를 들고 왔다. 그 중 한 사람은 혼자 왔는데 500ml 맥주 4캔을 들고 왔다. 다들 깜짝 놀라니, 2캔에 9천원 4캔에 만원이길래 4캔을 샀다고 했다. 숙소에 오면 분명 누군가에게 요긴하게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그 누군가가 내가 되어 단 맥주를 얻어마셨다. 사람들이 여럿 모이면 입담 좋은 사람들은 꼭 있게 마련인 것 같다. 덕분에 나는 예정에 없던 웃긴 이야기들도 듣고, 평소 만날 수 없는 분야의 썰들을 들었다. 게스트하우스 숙소 화장실 바구니에는 누군가들이 남기고 간 폼클렌징이며, 오일이며 화장품들이 가득했다. 엊그제는 핸드워시로 얼굴을 씻었는데 오늘은 누군가 덕분에 폼클렌징으로 세안을 했다. 

하고수동 해변에서 식전 맥주

 

다음 날 아침, 비가 왔다. 비가 와서 원래 하고 싶었던 우도봉 오르기는 다음 기회에 택이와 함께 와야지, 생각했다. 여행해서 뭔가 하고자 한 걸 못하면 아쉽기도 하지만 다음을 위해 좀 남겨두는 것도 좋다. 게하 사람들 몇몇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나왔다. 그 중 한 명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혼자라면 안 먹었을 것이다. 덕분에 점심을 든든하게 먹고 비를 피해 성산일출봉 근처 경치 좋은 카페에 왔고,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이렇게 글을 썼다. 글을 쓰는 두 시간 동안 거짓말처럼 비는 그치고 지금은 창 밖에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넘실거린다. 성산일출봉은 노랗고 푸른 언덕을 빛내고 있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우도에서 신나게 전기 자전거를 타고 우도봉에 올랐을 것이다. 비가 와서 나는 성산일출봉이 코 앞에 보이는 카페에서 여행의 전반을 정리하는 글을 썼다. 둘 다 정말 멋진 일이다. 

 

갑자기 거짓말처럼 맑아진 하늘

 

이제 제주 시내로 돌아간다. 마지막 숙소는 이번 제주 여행에서 가장 값비싼 숙소고, 비싸서가 아니라 숙소의 아이덴티티가 가장 기대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번 제주 봄 여행의 마무리는 어떻게 될지 살짝 설렌다. 돌아보니 이미 많은 것을 채운 것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