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내가 되는 길에서 by.최현희

2022. 8. 27. 10:00네번째 서랍: 문화 이야기/책을 읽다

다시내가되는길에서_책표지
다시내가되는길에서

페미니즘 리부트 운동과 더불어 이어진 강력한 백래시를 경험한 페미스트 교사 최현희 선생님의 회복기. '다시 내가 되는 길에서'. 나도 익명의 블로그에서 페미니스트 교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내 생각과 고민을 나누고 있는 입장에서 그 분이 겪으신 일들이 남일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구조적으로, 실체적으로 명확하게 존재하는 성차별적 고정관념과 실태를 이야기하고 그것을 개선해나갈 필요성을 교육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셨을 뿐인데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고 한 인터뷰로 신상이 털리고 직장인 학교에는 각종 민원이 빗발쳤다. 민원이 잦아들 즈음 조선일보에서는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왜곡된 보도를 통해 사이버불링을 선동했다. 그 여파로 일베를 비롯한 남초 커뮤니티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이버불링을 당한 선생님은 정말 힘든 시간을 겪으신다. 소송 이후 조선일보는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과 함께 정정보도를 냈지만 그건 최소한의 정의었을 뿐 회복과는 다른 문제였으리라. 한바탕 폭풍이 몰아친 뒤 폐허가 된 마음과 몸을 다시 세워가는 선생님의 하루하루가 너무나..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게 했다. 밥을 지어 먹고, 짧은 요가를 하고, 트위터를 하며 빈둥거리시는 것도, 양수리에서 산책을 하시는 것도, 자녀인 별이와 시간을 보내시는 것도, 버스를 타고 옆 동네로 가는 모습도, 병원에서 상담받으시는 모습도, 큰 수술 후 회복해나가시는 과정도..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떠오르는 선생님의 생각들과 함께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가 놓였다가 벅찼다가 잠기곤 했다. 선생님 곁에 더 많은 좋은 사람들이 가득하기를, 선생님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용기를 얻는다는 걸 알아주시기를. 선생님의 행복과 안녕을 마음 깊이 바란다. 

 

마음에 담는 문장들

 

어떤 직업이든 이런 종류의 다정함 뒤에는 자신감과 실력이 있는 것 같다. 교사도 그렇다. 학교와 교실이라는 터전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어내야 하는 학생들 곁에서 나는 다정한 교사이고 싶다. 실력을 갖추고 힘을 빼고 싶다. 학생들이 아파하면 그저 '미안한' 마음으로 곁에 있어주고 싶고, 작은 일도 크게 격려하느라 호들갑스럽고 싶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게 지겨울 때가 있다. 언제쯤이면 우리 사회가 성차별에 절여진 유사뇌과학에서 놓여날까. 이제는 뇌에 성차가 있다는 주장 대신, 집요하게 성차를 강조하는 사회가 뇌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집단 간의 차이보다 개인 간의 차이가 언제나 더 크고 중요한 변수라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개념인가. 적어도 교육자라면 한 명의 어린이를 성별로 단정하고 판단하기 전에 어린이가 태어나서 경험하는 성찰별적인 환경과 사회문화적 조건을 조금이라도 더 진지하게 바라봐야 하는 것 아닌가. 

 

-> 정말 지난한 길인 것 같다. 나도 남자가~ 여자가~ 이런 이야기를 여전히 숱하게 듣는다. 사랑하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교회 공동체에서도. 가족들과의 대화에서도... 계속해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 나도 계속해서 성차보다 개인차가 더 크다는 이야기를 꺼내보지만, 언제쯤 이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 2022년에도 기세를 떨치는 성별고정관념적인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갑갑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계속해서 씨 뿌리는 사람의 마음으로 나도 반복적으로 침묵하지 않고 이야기하려 한다. 관습에 지지 않고 빠른 변화를 바라는 마음에 지치지 말자고 다짐하며. 

 

생각해보면 15년간의 교사 생활에서 정말 어려운 것은 권력을 내려놓는 게 아니라 권력을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권위주의를 타파하려는 노력은 내가 교실 공동체의 성인이자 교사로서 짊어져야 할 권위의 무게와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로 변질될 때가 많았다. 규율이 없는 교실의 흐름을 기민하게 포착하고 공간을 독식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또래 학생들이었다. 상황을 바로잡고자 단호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권위를 앞세우는 관성 같이 게 여지없이 내 안에서 똬리를 트는게 느껴졌다. 늘 그 틈바구니에서 시달렸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다. 가르침의 개념과 본질을 세심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겠지만 가르침의 책임을 단지 '인격적인 존중'이나 '평등한 관계'같은 것으로 회피해서는 안 된다. 인간적 관계가 바탕이 될 수는 있지만 학생과 인간관계를 맺으려고 교사를 하는 게 아니다. 교실을 평등한 친목회 같은 것이 아니다. 

 

-> 공감. 교사는 학생과 인간으로서는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할 존재지만, 교실에서 교사와 학생이라는 역할에 부여되는 권위와 책임의 무게는 다르다고 느낀다. 대통령이 나도 한 명의 동일한 시민이니까 시민 입장에서 같은 책임만 지겠다는 것이나 부모가 부모로서의 권위를 다 버리고 책임도 다하지 않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느껴지는 것과 같다. 인간으로서의 기본권과 역할에 따른 책임은 다르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흔들림. 그러니까 나는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이다. 안정적인 행복, 정지 상태로 유지되는 즐거움 같은 것은 없다. 불행도 마찬가지다. 나는 자유를 만끽하고, 인생의 어떤 새로운 시작점에 마음이 충만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별이를 향한 시린 마음을 감당하고 있다. 여러 감정을 선명하게 느낄 때마다 나는 그것들이 서로를 상쇄하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다. 나는 아프면서도 즐겁고, 행복하면서도 슬프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그 사이를 오가고 흔들리며 균형을 잡고 서 있는 것이다. 양수리도 보고 싶고 별이가 그립다. 그러면서도 지금 혼자 글을 쓰는 이 순간이 미치도록 좋기도 하다. 

 

-> 마음도, 삶도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오가지만 그것들이 서로를 상쇄하지 않는다는 것.. 사람도 삶도 감정도 매우 입체적이라는 것.. 동의한다. 다양한 감정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라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걸 확인받을 수 있어 반갑다.

 

아마 내 인생이 별 탈 없고 순조로웠다면, 나는 유년기의 불우함을 그런대로 '극복'한 성숙한 어른으로 사십대를 맞이했을 수도 있겠다.(아, 그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나는 약해지는 경험 속에 혼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만큼 약해진 상태가 되면서 십대에 던졌어야 할 질문 앞에 다시 섰다. 나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지금은 앙상하고 약해진 그를 용서한다는 것은 어떤 방식일 수 있을까. 가정폭력 가해자들이 노년에 이런 식의 '반칙'을 하는 일은 흔하다. 나에게 포악하게 힘을 휘두르던 억압자는 어디에도 없다. 늙고 약해진 채로 힘없이 앉아 눈을 꿈뻑히며 나를 바라본다. 나는 내가 그를 용서할 수 있을지, 있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질문하다가, 그보다 내가 그의 딸이 되었으므로 그저 겪어야 했던 그 많은 경험들로부터 내가 얼마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그 많은 경험들을 내가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지, 필요한 만큼 복기하고 다시 정의할 수 있는지, 어린 나를 내가 달래고 위로할 수 있는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해내기 전에, 어쩌면 시작도 하기 전에 아빠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두렵기도 하다. 

 

->가정폭력 경험자로서 공감되는 부분

 

한 친구는 교회 신자라는 이유로, 교회의 수구적인 커뮤니티 문화 속에서 마땅히 이혼해야 하는(남편이 폭력을 저지르는) 상황에서도 이혼을 안 하고 버티는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그 친구의 하나님을 정말 미워했다. 오랫동안 미워했다. 지금도 미워한다.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서 공감되는 부분. 부모님의 이혼을 간절히 바랐던 나도 비슷한 마음을 품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삶이 폭력->이혼으로 명쾌하게 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삶의 복잡한 여러 맥락과 옳고 그름을 떠난 개인적인 답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이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닌데 오해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런 오해를 불러 일으킨 책임은 믿는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기에 선생님을 탓하는 건 아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한쪽에서 용감하게 선을 넘고 벽을 허물면서 발전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꾸준한 시간과 노력에 의해 친밀하고 깊어진다. 그와 나 사이에는 아직 친밀함의 계좌가 다 차지 않은 것이다. 자장가를 불러주는 관계가 생길 수 있다는 그 가능성만으로도 부자가 된 느낌이기는 했다. 나는 이제 인생에서 그런 것들에 집중할 것이다. 소비하는 데서 얻는 위로 같은 것은 너무 하찮고 질린다. 나를 위한 선물이라고 돈을 쓰는 것도 싫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관계를 얼마나 많이 맺고 있느냐가 삶의 만족도, 행복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결과를 들었다. 동의한다. 나도 친밀한 관계를 소중히 가꾸어 나가는데 집중하는 인생을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