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밤 by.은유

2024. 2. 8. 16:33네번째 서랍: 문화 이야기/책을 읽다

해방의-밤-by.은유

 

책을 덮고 나면 항상 자리에 앉아 쓰게 만드는.

나를 옭아매고 있던 부당한 생각, 외로운 싸움, 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도와주는.

다정한 나의 구원자, 은유 작가.

 

신기하게도 은유 작가의 책을 읽고 나면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다가오는 말들>, <쓰기의 말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에 이어 2024년 1월에 출간된 <해방의 밤>을 읽었다.

해방의 밤은 은유 작가를 해방시켜 주었던 책, 영화, 구절을 소개하며 그에 얽힌 은유 작가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책이다.

크게 4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1.관계와 사랑 2.상처와 죽음 3.편견과 불평등 4.배움과 아이들

 

은유 작가는 생각하는 대로 살아내려고 하는 점이 참 존경스럽다.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 거대한 구조의 문제, 개인이 쉽사리 바꾸기 어려운 힘빠지는 일들, 감당하기 버거운 슬픔이 깃든 일들, 자기 검열에 노출되는 일들도 회피하지 않고 용기내 마주한다. 함께 하고, 경험하고, 사유하고, 쓴다. 그리고 그런 삶으로- 나만 생각하지 않고 타인에게 이어지는 삶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내 아이만 위하면, 내 아이를 위할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만 생각하면, 나를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진정 나를 위하는 삶이다.

 

올해는 글을 쓰며 브런치 작가에 도전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독립서점에서 하는 글쓰기 수업도 참여하고 있다. 어떻게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마음이 많이 쏠려있었다. 그런데 <해방의 밤> 출간 기념 북토크 현장에서 은유 작가님이 하신 이야기가 머리를 댕-울렸다. '작가'란 직함 보다 '글'에 대한 고민을 더 하라고. '나는 왜 글을 쓰는가'를 고민해 보라고. 자기 만족적인 글에서 끝나는게 아니라고 한다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쓰자'는 마음으로 글을 써 보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가? 나는 글을 통해 세상에 어떤 작은 씨앗을 심을 것인가.

 

나도 좋은 책들을 통해 나의 해방을 이루고 더 나아가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내 글을 읽는 사람들도 해방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은유 작가님이 추천해주신 해방의 책 목록 잘 참고해야지.

 

 

마음에 담는 문장들

 

가부장제를 대처하는 자세- 끊어내지 않고 연결하는 싸움 계속하기

-나의 무신경함이 누군가의 평화를 깨드릴 수 있으며, 적어도 약자의 입막음이 평화가 아님은 알게 되었다. 더디 걸리더라도 배움을 통한 해방은 내적 평안에 기여하고 낯빛과 표정을 바꿔놓는다고 믿는다. 해방은 평화를 물고 오는 것이다.(23p)

 

-똑같이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수십년을 살았는데 그 능력은 딸에게만 전송됐습니다. 왜 두 남자는 자기 식구를 위해 밥 한끼 차려주고 싶은 마음, 의지, 노력을 보이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일을 시키는 데도 만만찮게 신경이 소모되는 법입니다. 

-나는 나를 이중으로 비난합니다.

-자신을 비존재(非存在)로 만드는 건 여자들의 개인기이자 생존술입니다. 

-내가 바라는 건 명절 철폐도 아버지와 밥 먹지 않기도 아닙니다. 집을 밥의 즐거움을 되찾는 장소로 만드는 것입니다. 끊어내지 않고 연결하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싶습니다. 솔닛이 말한 작가의 책무인 "이야기를 깨뜨리는 사람이자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일을 계속해보고 싶습니다. 

-"낮은 곳들로부터 벗어날 때 사다리로 쓴 논리와 서사를 다른 이들에게도 건네주고 싶다"는 솔닛의 자상함이 내 막힌 글을 뚫어주고 이야기를 끌어내주었듯이, 내 이야기도 누군가의 말문을 틔우는 입김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출근이 없어서 퇴근도 없는 돌봄노동, 폭력의 불길을 잡아야 하는 감정노동은 오로지 그녀의 몫입니다.(벤 로치 감독, <미안해요, 리키>)

-가부장제 시스템에서 주 양육자의 초기값은 엄마로 설정돼 있으니까요.

 

-"그건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엄마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은 것뿐이다."

-'엄마는 왜 나를 두고 갔을까'에서 '엄마는 왜 나를 두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로 질문이 나아가기까지 네 온 생애를 바쳤다. 

 

 

가족의 폐단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첫째, 부와 빈곤을 세습하는 것. 둘째, 사생활권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개성과 인권을 억누르고 갈등을 은폐하는 것. 셋째, 모성 역할과 가사노동에 여성을 속박하는 것.(미셸 바렛, 메리 맥킨토시 <반사회적 가족>)

 

 

모성 강박에서 벗어나기

 

아버지가 세계에 나아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할 때, 우리는 그게 아버지가 응당 해야 할 몫이라며 용인한다. 어머니가 세계에 나아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할 때는 어머니가 우리를 버렸다고 느낀다.(데버라 리비, <살림비용>)

 

"'애들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 하지만 애는 내 삶을 망가뜨려.' 양가성을 받아들이는 능력, 그것이 바로 모성애가 아닐까"(모이라 데이비, <분노와 애정>)

 

"엄마는 늘 우리를 사랑해야 한다고 느끼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한시도 빠짐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관계란 없어요."

 

'하지 마'의 세계에서 '욕구하는 사람'의 세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에는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다."

-욕구하면 안 되는 사람에서 욕구해도 되는 사람으로, '욕구에 대한 욕구'를 스스로 허용하게 됐습니다.

-'하지 마'의 세계에 갇힌 사람은 최초의 욕구가 발동했을 때 '잘하는 법'을 고민하기도 전에 내가 이걸 해도 되는 사람인가, 하는 자기 의심과 싸우게 됩니다. 

-<욕구들>에서 저자는 '딸'의 목소리로 묻습니다. "어머니가 결코 갖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나 자신에게 허용할 수 있어?"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뻥 뚫리는 말입니다. '하지 마'의 세계에서 엄마를 구원하는 멋진 문장이죠.

 

사람에게 붙은 '라벨'을 해체하기

 

"이 사람은 지금 이러니까 이런 사람이고 저 사람은 지금 저러니까 저런 사람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버지니아 울프는 사람에게 붙은 '라벨'을 해체하는 작업, 곧 누군가를 '이런 사람' 혹은 '저런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데 수반되는 허위를 폭로하는 일에 작가 인생의 상당 부분을 바쳤다고 해. 훌륭한 작가가 그렇듯 울프도 인간을 옥죄는 숨길을 열어주는 작가였던 거지. 

 

타자로부터 오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랑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타자에게서 비롯되는 시련이나 심오하고 진실된 온갖 경험을 완전히 회피하려 한다는 데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위험이란, 그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수용하고 오래가야만 참사랑이란 건 결코 아닌데요, "그들의 편의에 부합하지 않을 타인이라는 존재"를 포기하고 열정을 절약하는 경향으로 인해 사랑이 위협받고 있음을 염려하는 노철학자의 말에는 동의하게 돼요. 

-사람 깊게 사귀는 게 큰 공부니까 부디 잘해보라고요. 그 말은 이 사랑의 정의에서 왔어요. '사람 깊게 사귀는 일'이란 '유아론적인 '나'의 삶, 즉 '하나'의 삶을 포기"하고 "'둘의 무대'가 가져오는 고통과 충돌, 불확실성 등을 감수하고, 그것과 지속적으로 대면하는 것"을 뜻하고요, '큰 공부'는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의 구축'이겠지요.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거대한 왜곡"(알랭 바디우, <사랑 예찬>)

 

좋은 관계

 

"잊은 듯 살다가도 문득 따뜻한 애정이 솟구치며 그리워지는 것, ( · · · )불가에서는 이를 좋은 인연이라 하더군요. 잊고 있다가도 만나면 더없이 기쁜 관계 말입니다."(김수우 ·김민정, <나를 지켜준 편지>)

 

다름을 넘어서 이어지는 것

"가진 것이 다르고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고 해서 계속 밀어내고 비난하기만 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이어질 수 있어?"

"모두가 애써서 살고 있잖아. 너와 똑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삶이 전부 다 잘못된 거야?"(윤이형, <붕대 감기>)

-내가 정한 속도와 방향으로 타인을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했던 과오가 떠올랐다. 여성들끼리의 연대의 중요성을 말하면서도 막상 나의 일상과 현실의 구체적인 관계에 놓인 여성을 만나는 일엔 미숙했던 것 같아. 

-책에도 나오는 대로 먼저 연락을 해서 안부를 묻거나, 약속을 잡자고 하거나, 시시콜콜 속사정을 묻고 위로 하는 일 같은 것들, 마음을 낸 다정한 행동들, 그 계산 없는 노동이 결국 환대이고 연대일 텐데 말이야.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어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저항적 운동은 작가나 활동가여서 하는 게 아니다

 

"이런 사태에 누군가 관여하게 되는 것은 그가 작가나 활동가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관여하는 것입니다"(아룬다티 로이, <9월이여, 오라>)

 

어떻게 늙고 싶은가

 

-'줄 서는 사람들 이해가 안 돼'라고 무심코 말하지 않기 위해 몸소 줄을 한번 서보기로 한 거지.

-타인을 비난하지 않고 할 말을 하는 네가 존경스러워서,

-파도처럼 머물다가 사라지는 이생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먼저 남의 말을 듣는 사람이 돼야 해. 

 

친절을 선택하기

 

-삶은 그저 삶일 뿐이지요. 늘 고난이 있습니다. 좋은 순간도 나쁜 순간도 있고, 저는 좋든 나쁘든 그 모든 순간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우리는 고통과 슬픔을 경험할 테니까요. 그것은 삶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친절은 우리가 베풀거나 베풀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어요.(...)저는 자신에 대한 친절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삶의 고난이 자아내는 난폭함으로부터 '나의 감정과 생활'을 보호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글을 자꾸 쓰다 보니 --'남의 입장과 감정'도 보이게 됐고, 그 남을 존중하기 위해서 내 할 일을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내가 친절해지는 삶의 안전장치를 스스로 구축하는 게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 친절한 사람이 되기 어려운 구조를 파악하는 사람.

 

소소한 것의 가치

 

"고양이들이 밤에 몸을 누이는 장소, 열매를 기대해볼 수 있는 나무, 울다가 잠든 사람들의 집... 산책할 때 내가 기웃거리고 궁금해하는 것들도 모두 그렇게 하찮다. 그러나 내 마음에 거대한 것과 함께 그토록 소소한 것이 있어, 나는 덜 다치고 오래 아프지 않을 수 있다. 일상의 폭력과 구태의연에 함부로 물들지 않을 수 있다."(한정원, <시와 산책>)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일

 

같은 사물이 다르게 감각되는 기회를 갖는 일, 여행의 묘미일 것입니다.

도망가야 할 고통의 한계점을 모른다는 건 자기 보호의 경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기와 거리를 두는 '바깥의 시선'을 갖는 것만큼 '내면의 감각'을 회복하는 일도 중요한 것 같아요.

문학과 여행은 닮았어요. 다른 삶이 있음을 발견하고 나의 삶도 다르게 상상하게 하니까요.

 

폭력을 묵인하지 않는 힘의 원천

 

폭력을 행하거나 묵인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건 폭력에 대한 말과 생각이 쌓인 덕분입니다. 

생각할 시간을 갖고 꾸준히 글을 썼던 것, 그것이 내 안의 폭력성과 일상의 폭력에 눈뜨게 해준 것 같습니다.

영화 속 어른들을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을 뿐이고요. 

때로는 (성)취하는 삶보다 해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도 세상에 기여하는 방법 같습니다.

 

생존자는 약자일 수는 있지만 약한 사람은 아니다.

 

-"생존자가 약자일 수는 있지만 약한 사람은 아니다. 단순히 피해자가 아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있는 힘을 다해 달려온 전사들이다. (...) 몹쓸 짓을 당한 게 아니라 많은 일을 겪은 것이다. (...) 왜 이런 것을 성적인 것으로만 보려 하나. 누군가가 내 경계를 함부로 침범한 일이다. 나의 자율성을 무시한 행동이다." (최예원 외, <죽고 싶지만 살고 싶어서>)

 

 

나만 안전한 사회는 없다.

 

이렇게 폭력이 만연한 풍토에서 어느 직종이라고 해서, 어떤 스펙으로 무장을 한들, 몇살이라고 해서 안전할 수 있겠느냐고요.

나약하고 구멍 많은 인간이라서 잠시라도 성찰을 멈추고 휩쓸려 살다보면 짓는지도 모르고 죄를 짓습니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게 그만큼 힘든 일이기에.

우리는 남의 비극이나 고통이 아주 멀리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토록 가까이 있다!(이창동, <시>)

 

슬픔을 이야기하기

 

-지나친 배려는 때론 배제가 된다.

-슬픔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슬픔의 일부

-우린 슬픔에 무지한 종족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약자로 분류되고, 약자는 구제의 대상이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권리의 주체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공적 발언의 장이 주어지지 않고, 슬픔은 각자 삭여야 할 사적 과제로 여겨집니다. 슬픔을 표현하는 말도, 슬픔에 공감하는 말도 공동체에 흐르지 못하니까 슬픔에 관한 언어가 빈곤하죠. 슬픔에 관한 지혜가 모자랍니다. 

 

-문명이 지닌 상처이며 비사회적인 감성인 슬픔은 인간을 목적의 왕국에 종속시키는 일이 온전하게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세상은 다른 어떤 것보다 슬픔이나 애도를 온갖 방식으로 치장하고 변질시켜 사회적인 형식으로 만든다."(아도르노)

-"사람들이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면 하나의 인식에 도달하는데, 그 대상은 결코 슬픔의 감상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삶의 조건들에 눈뜨기 쉽다는 것입니다."(김진영, <상처로 숨 쉬는 법>)

-사람이 소중한 것을 잃고 나면 세상이 보이는 사람이 되죠. 슬픔의 렌즈로만 보이는 은폐된 진실을 보았기에 권력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로 거듭나죠.

-슬픔이 통제되고 놀이가 비난받는 이 일그러진 세상에서 시험과 노동에만 복속된 삶을, 우린 왜 누구를 위하여 평생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나의 상처로부터 해방이 되려면 이 사회적인 상처를 볼 줄 알아야 한다."(아도르노)

 

 

타자를 위한 글쓰기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부끄러운 삶이란

 

선생님은 모르는게 창피한 게 아니라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이, 남을 먹일 음식 하나 할 줄 모르는 게 부끄러운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200p)

 

책 읽는 것만 성장을 가져오진 않는다

 

책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교감하며 느낄 것은 느끼고 배울 것은 배운다는 걸 이젠 안다. 타인들의 삶을 관찰하고, 아이의 성장을 가까이 지켜보며 자연스레 터득했다.(210p)

 

이해는 멀고 분노는 가깝다

 

잘 모르면 얘기를 듣고 공부하며 알아가는 게 순리지만 이해는 멀고 분노는 가까워서 대개는 자기 불안을 혐오로 방어하는 것 같아.(214p)

 

 

장애는 비정상이 아니다. 

장애여성이 불굴의 의지로 정상성에 도달하는 장애 극복 서사아니라, 몸으로 부딪치면서 사회와 제도를 바꾸며 살아온 고분고분하지 않고 위험한 사람의 이야기가 담겼어요. 

 

"사람이 태어나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무런 장애나 아픔을 경험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어떻게 '장애가 없고, 아프지 않은 상태'가 '정상'이 될 수 있을까."(장애여성공감, <어쩌면 이상한 몸>)

 

말하기의 힘

 

삶을 짓누르는 바윗덩이 같은 압박감만이 아니라 신발 속에 든 쌀알 같은 거슬림도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감정에서 풀려날 수도 있겠지요.

 

솔닛은 세상의 이야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하는 사람'이 되라고 조언합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는 세상을 둘러싼 그 물의 일부가 되어, 기존의 이야기들을 훼손하거나 강화할"거라고요. 그러니까 부당함에 침묵하지 말자, 반박하고 저항하는 말들이 물처럼 넘치도록 하자는 뜻이겠죠.

 

경험을 재구성하는 글쓰기

 

글쓰기는 경험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이죠. 의지보다 기술의 영역이라서 생각을 연마할 연장이 필요하답니다. 내면의 낡은 생각을 부수고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 나가는 도구, 이걸 니체 '망치'라고 했고, 카프카'도끼'라고 했습니다. 

 

힘 있는 자들은 언제나 분리 정책을 썼습니다. 노동자를 쪼개고 위계를 세워서 노동자끼리 대립하게 만들죠. 단결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노동 현실의 구조적인 불합리를 유지합니다.

 

능력주의라는 환상

 

한 사람의 '능력'이라는 것은 타고난 재능이나 자질보다 가족으로부터 우수한 학업 기회가 꾸준하게 제공되느냐, 행운이 따르느냐 등 비능력적 요인에 의해 많은 것이 좌우됩니다. 그런 점에서 "'부모를 잘 만나지 못한 능력'이 현수의 능력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게 됩니다. 저자는 말해요. "능력은 환경적·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온전히 개인에게 속한 능력'이란 환상이다."(박권일, <능력주의와 불평등>)

 

또 하나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왜 능력을 꼭 학력과 성적으로만 측정하는가? 

평가를 거치지 않은 능력은 무능력으로 보이게 합니다.

공정함의 대명사 같은 능력주의가 실상은 차별과 불평등의 근거가 되는 이 부조리한 현실이 너무 완고하게 느껴졌습니다.

"시험은 능력을 제대로 검증해주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한번의 시험이 지속적인 차별을 정당화할 근거가 되지도 못한다."

 

노동은 평등한 것

 

노동은 평등하구나. 공부 잘하고 시험 잘 봐 정규직 되는 분들도 대단하지요. 하지만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 꺼리는 일들을 하는 것도 대단한 거란 걸 새삼 느끼게 되더군요. 세상의 잣대에 제 생각이 길들여진 것이죠. 노동자는 평등한 겁니다. (이용덕, <우리가 옳다!>)

 

어떤 모임에 갈 것인가

 

삶에는 정답이 없음을, 남에게 좋은 게 나에겐 맞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기 위해서는 자기 경험을 다른 맥락 속에 넣어볼 수 있는 공적 관계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사는 방식이 여러 갈래라는 걸 아는 게 해방이죠.

 

당연한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로 세상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변화는 어슷비슷한 욕망의 재생산이 이뤄지는 집단이 아니라 상식과 규범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장에서 일어나겠지요. 어느 모임이든 헤어질 때 발걸음이 가벼운 곳으로 갑시다. 

 

글 쓸 때 주의할 점

 

장애인, 여성, 이주민 같은 소수자의 경우 개인이 잘못해도 집단이 매도당한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다, 글 쓸 땐 혹시 편견과 통념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 생각을 의심하고 책 내용을 내 일상으로 가져와 검토하기.

 

 

다른 사람과 함께 배우는 이유

이게 옳아. 그건 혐오야. 이런 말은 발언자에게는 정의감을 주지만 상대에겐 일단 무안함을 한 바가지 안깁니다. 한쪽이 당황해서 입다물면 대화가 단절됩니다.

 

비슷한 정보량과 익숙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끼리 왜 굳이 모여서 공부해야 하느냐고요. 그건 독백이지 토론이 아니라고요. 함께 공부를 해도 심기에 거슬리는 게 없고 이전과 달라지는 게 없으면 서로에게 좋은 공부가 아닐 가능성이 있어요. 사유는 마찰에서 싹틉니다.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인데, 배우려고 온 사람이 배울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건 당사자의 용기 부족이라는 원인도 있지만 공동체의 무능 때문이 아닐까, 하고요.

 

인간성의 가장 훌륭한 면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인간성의 가장 훌륭한 면들은 마치 과일 껍질에 붙어 있는 과분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만 보존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부드럽게 다루지는 않는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실제로 늙은이들은 젊은이들에게 줄 만한 중요한 충고의 말을 갖지 못하고 있다.

 

잠재적 가해자 취급에 관해서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라서 억울하지만 여자는 잠재적 피해자이기에 위험하잖아요. 위험하면 바꾸자고 말해봐요.

 

여성들은 자신의 신체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왜 상대의 억울함을 이해시키는 임무까지 맡아야 하는지, 우리 논의해보자고. 

 

그 남자 선배도 이 일로 뒤척였을까. 주변 사람에게 여자 후배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더니' 예민해져서 말하기가 조심스러운데 대화하는 방법을 찾고 싶다며 조언을 구했을까. 

 

목마른 자가 샘 파는 이치 같아요. 여자로 사는 일은 상대를 이해시키는 일이죠. 

 

이 세상 '아버지들'에게 설명의 통행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삶의 통로가 겨우 확보됐죠.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공감력이란 게 있다면 이 자기 증명의 혹독한 훈련 덕분일 것입니다.

 

인류를 둘로 나눠봅니다. 사사건건 자기 존재와 사정을 남에게 설명해야 했던 사람, 굳이 남에게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었던 사람. 

 

저도 감정노동을 소통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설명되지 않은 것을 설명하는 지적·정서적 ·감정적 노동을 한쪽에서 오래 전담했습니다. 이 관계의 불균형이 공감 능력의 양극화를 낳고 있겠지요. 사실 잠재적 가해자의 억울함은 그가 잠재적 피해장의 고통을 알면 사라질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적여 현상의 원인은 여성이 아니다.

 

-자신의 일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가지는 남성들은 '시아버지 되기'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즉, "집안 문제를 여성이 담당하니까 당연히 '갈등'의 당사자는 여성의 얼굴로 나타난다"(이라영, <정치적인 식탁>)고 진단합니다.

 

-여자 고객이 여자 직원을 무시하거나 여자 상사가 여자 후배를 질투하는 일은 가부장제의 약자들, 즉 '여성이 겪는 문제'(결과)이지 '여성이 만든 문제'(원인)은 아닙니다. 결과를 원인으로 바꾸지만 않아도 우리는 정확하게 미워하고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기득권도 고통받는다, 역차별이라는 말에 대하여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같은 사회적 약자가 받는 차별은 '죽고 사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돼 있습니다. 그걸 '심적 압박'의 문제와 균등하게 놓고 차별이라고 말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많이 죽는 거나 발암물질에 더 많이 노출되는 상황은 차별이 낳은 것이다. 노동자는 차별에 적응하면서 위험을 감수하려고 애쓰다가 병들고 다친다.(노동환경건강연구소 기획, <고동에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

 

일이 위험해서 다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위험한 일도 안전한 방식으로 일하면 다치지 않는다.

 

"세상에 안 힘든 일은 없어"라고 일반화하는 논리는 절실한 문제를 가려버립니다.

 

비난으로는 변하지 않고 애씀으로 변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 애써 글을 쓰고, 누군가 애써 글을 읽고 애써 소개하고요. 남의 말에 귀를 열고 질문하고 영향을 받는 것도 애씀이지요.

 

저는 '애씀 공동체'를 키워나가는 일이 직업이 되었습니다. 다양한 존재들과 만나서 읽고 쓰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같이 애쓰고 있지요.

 

 

무력감을 벗어나는 길, 해방의 언어를 유포하기

 

"세상은 안 바뀌는 것 같지만 제가 바뀌었거든요. 저도 세상의 일부이고 적어도 제 몫만큼은 변했잖아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저 말이 그럴듯한 자기 위안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이 듭니다. 세상은 크고 나는 작아서 어쩔 수 없다며 역할에 한계를 긋고 비참한 세속에서 한발 물러나 있기 위한 말은 아닐까 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