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치앙마이-내 인생 도시와의 첫 만남(2)

2020. 3. 24. 22:30창문 밖 풍경: 여행/해외 여행

처음부터 3등석을 타려던 건 아니었다. 당연히 에어컨도 구비되어있고 편안하게 누워서 갈 수 있는 1등석으로 구매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때가 태국 사람들도 휴일인 때여서 그런가 치앙마이행 1등석 좌석은 모두 매진이었다. 무턱대고 표를 사러 갔다가 우리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비행기를 타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비행기 가격을 듣고 마음을 바로 접었다. 그리고 3등석 기차표를 끊었다. 무려 낮 2시 표였다.

계획대로라면 밤 기차를 타고 편안하게 자면서 가서 눈을 뜨면 아침에 치앙마이에 쨘, 도착하는 거였건만..

낮 2시 표는 점심부터 기차에서 먹게 되는 길고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3등석 기차여서 3이라고 적혀있는 건 아니겠지 ⓒ정오의달

 

기차 시간에 맞춰 부랴부랴 근처 KFC에서 햄버거 세트를 사서 기차에 올랐다. 옛날 기차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둘이 앉기엔 조금 비좁은 짙은 색의 의자에 K와 나는 마주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문이 시원하게 뚫려있었다. 수동식으로 여닫는 문이었다. 창틀의 바랜 정도를 보며 기차의 연식을 생각해보았다. 우리 나이보다 많을 수도 있겠는걸. 기차가 움직이는대로 기차 소리가 덜커덩 덜커덩, 시원하게 뚫린 창문 사이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잠은 제대로 잘 수 있을까, 순간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낮에 기차를 타서 좋았던 점은 풍경을 볼 수 있었던 점이다. 느리게 가는 만큼 풍경을 조금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들이 도시와 시골이 구분되어있어 도시를 벗어나면 하늘, 들판, 나무, 드문드문 낮은 집들이 이어진다. 개발되지 않은 시골의 풍경은 비슷비슷하다. 그래서 타지에 와서도 내가 머물던 곳인양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을 받게 된다. 

 


 

대부분의 3등석은 비어서 한산했다. 그런데 우리 옆자리에 몸집만한 커다란 배낭을 멘 금발 곱슬머리 중년의 여성이 앉았다. 중년보다는 할머니에 가까운 분이었는데 그 나이에 혼자, 커다란 백팩을 메고, 나시티를 입고, 3등석을 타고 여행하는 모습이 너무 신선하고 멋있었다. 미소로 인사를 몇 마디 나눈 후에 나는 가져간 그림 도구로 그분을 엽서에 그려서 선물로 주었다. 그분은 기쁘게 그 선물을 받았고 나도 기쁘게 그릴 만한 대상을 만난 게 좋은 추억이 되었다. 

해가 지는 풍경 ⓒ정오의달

 

그렇게 먹고, 구경하고, 그리고,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덧 창 밖이 붉게 물들었다. 이제 의자를 펼쳐서 침대로 만들 시간이 된 것이다. 통로 저편에서부터 역무원이 침대 세팅을 도와주며 걸어왔다. 변신로봇을 만들듯이 의자를 침대로 변신시키는 게 꽤 설레는 순간이었다. 곧 우리 차례가 왔고, 우리의 의자는 펼쳐져 2층 침대로 변했다. 친구와 나는 누가 1층과 2층에 자느냐를 간단한 사다리 타기로 정하기로 했고, 그 사다리 타기는 너무나 간단하여서 옆으로 이동하지 않고 바로 시작하자마자 아래로 직진하여 1초 만에 결과를 냈기에 우리는 황당해하며 엄청 웃었다. 이런(?) 사다리 타기의 결과와는 관계없이 친구는 1층에, 내가 2층에 자기로 합의를 했다. 

 

그리고 밤이 되었고 우리는 잘 자라고 인사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낮에 먹었던 KFC 치킨이 문제였을까. 친구는 배탈이 나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하고 3등석의 불편한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려야 했다. 친구가 1층에서 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2층에서 잤다면 계속 오르락내리락거려야 했는데... 정말 힘들었을 거다. 

나는 친구가 밤새 그런 곤경에 처한 줄도 모르고 2층에서 잠을 잤다. 

이른 새벽이 되었고, 드디어 기차는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이른 새벽, 그리고 북부의 도시 치앙마이는 차가운 새벽 공기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우리는 기차역에서 썽태우를 기다리며 오들오들 떨었다. 그리고 썽태우를 타고 숙소가 있는 타패게이트 근처에 도착해서도 너무 이른 시각이라 체크인을 하지 못하고 맥도날드에서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아야 했다.

아침이 되어 게스트하우스에 로비에서 누워있다가 겨우 방이 비어서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친구는 치앙마이에 도착하자마자 앓아누웠다. 나는 친구를 숙소에 두고 동네를 둘러보러 나왔다. 친구는 혼자 있을 때 울었다고 했다. 돌아올 때 친구를 위한 죽을 사 가지고 오긴 했지만 친구는 내가 곁에 있는 걸 더 바랬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대학 동기가 친구와 유럽 여행을 갔는데 친구가 유레일 패스를 가자마자 잃어버려서 결국 헤어져 따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같이 여행을 갈 정도로 친했었지만 다녀와서 오히려 서먹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여행지에서 여행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감동스러운 이야기지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특히 여행을 자주 갈 수 있고 익숙하다면 좀 더 마음의 여유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더 포기하기 어렵겠지. 지금의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다음번엔 다른 선택을 해보고 싶기도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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