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 신앙

2020. 9. 16. 13:03첫번째 서랍: 나의 믿음/묵상

 몇 년 사이에 미니멀라이프에 관심이 많아졌다. 나는 본래 아기자기한 소품을 좋아해서 어렸을 때부터 소품류 사기를 좋아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저분한 거 싫어하는 우리 엄마에겐 잡다한 것을 사 와서 집안을 복잡하게 만드는 내가 골칫덩어리였을 것 같다. 그래서 종종 내 물건을 버린다는 엄마와 버리지 말라는 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한 번은 내가 학교 갔다 온 사이에 엄마가 커다란 비닐봉다리 안에 모아둔 나의 편지들을 전부 내다 버려서 엄청 화를 냈던 기억도 있다. 비닐봉다리가 아니라 상자에 고이 넣어두었다면 그 편지들은 쓰레기장 행을 면할 수 있었을까? 결국 나의 편지들은 되찾을 수 없었다. 최근에도 친정집 정리를 하며 나의 오랜 다이어리들을 버리고 싶어 하는 엄마로부터 간신히 나의 다이어리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 '내가 이사 가서 공간이 넓어지면 가지고 갈게.'

 

 처음으로 미니멀라이프에 관심이 생겨 읽게 된 책은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라는 책이었다. 유루리 마이라는 일본인이 쓴 만화책인데, 저자는 동일본대지진(쓰나미)을 겪고 난 뒤에 물건을 쌓아두고 사는 삶에 대해 성찰하고 집을 비우기 시작한다. 책의 몇 페이지는 컬러로 들어가 있는데 아무것도 없이 반딱반딱 빛나는 거실이 그땐 충격적이었다. 아,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인식의 전환이었다.

 

 두 번째로 접한 매체는 곤도 마리에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넷플릭스 프로그램이었다. '어, 또 일본인이네? 일본인들이 미니멀리즘에 관심이 특히 많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영상을 봤다. 이 프로그램은 곤도 마리에가 미국의 일반 가정집들을 방문해서 정리의 기술을 전달하며 집을 정리해주는 컨셉의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며 배운 정리법은 지금도 활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TVN의 '신박한정리'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신박한 정리는 연예인들의 집을 정리해주며 정리 꿀팁과 비포 애프터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신애라와 썬더 이대표가 정리 컨설턴트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인만큼 집 구조나 상황이 한국적이라 더 공감하며 볼 수 있어 좋았다. 썬더 이대표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의 영상도 종종 챙겨본다. 미니멀리즘이나 정리에 대한 마음이 흐려질 때마다 이런 콘텐츠들을 보며 다시 정리욕을 불태운다. 집에 있는 '언젠가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몇 년째 쌓아둔 물건들을 비워낼 때의 홀가분함. 아무렇게나 쌓여있던 공간이 정리되었을 때의 단정함과 그 아름다움. 그렇고 그런 물건이 아니라 내가 정말 좋아하고 아끼는 물건들을 자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의 즐거움. 미니멀리즘이란 포기가 아니라 공간을 비움으로 내 마음을 더 충만하게 채우는 일임을 배우고 있다.

 

 신앙에도 미니멀리즘이 필요하단 생각을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거대하게, 끊임없이 굴러가던 교회 활동이 일시에 멈췄다. 처음엔 당황스럽고 낯설었다. 감사했던 건 주중에 친구들과 했던 예배모임이나 작은 소모임들의 경험이 이 시기를 적응하는데 완충재 역할을 해준 것이다. 그래도 단기적인 상황에서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시간이 길어졌고, 지금은 아.. 이건 단기적인 상황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코로나는 끝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후에 또 이와 유사한 전염병이 돌 수도 있겠구나. 올해 경험했던 끊이지 않던 장마, 폭우와 같이 관념 속 기후위기가 아닌 실제로 내 피부에 서늘하게 와 닿는 기후위기의 영향들, 그로 인한 재해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겠구나, 란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나는 신앙의 삶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든다. 멈춘 줄 알았던 시간이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달려가던 우리를 멈춰 세우고, 열을 식히고, 성찰하게 하는 시간은 아닐까. 그 시간을 위해 바울 선생님의 이야기처럼 우리의 신앙도 미니멀리즘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을 쓸데없이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단순하게 살라고. 단순하게 나눈 삶의 조각들 중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꼭 채워 넣으라고.

 

 '주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크게 주의를 빼앗기지 않는 생활방식'이란 말이 와 닿는다. 하나님과의 교제시간-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사색하는 시간-은 시간을 떼어 놓는다고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았다. 떼놓은 시간을 미루고 미루다 지키지 않기도 일쑤고, 정해진 시간에 성경책을 펼친다고 해도 내 마음이 유튜브 영상에 가있거나 포털의 뉴스 기사에 가있으면 형식적으로 성경의 글자를 훑어내리기에 바쁘게 된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주의를 빼앗기지 않는 상태'인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내 마음과 정신을 쥐어짜 내서 하나로 모아 만들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생활방식'이라는 것은 수도 없이 생활과 신앙 사이에서 흔들거렸던 내 마음을 관통하는 말이었다. 생활과 신앙은 따로 떨어져 있는 다른 상태가 아니라 생활이 곧 신앙이고 신앙이 곧 생활인 것이다. 내 생활이 분주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깃들 수 있는 여백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산책길(이 동네에 이사오고 3년이 넘어서야 오게 된...왜 이제서야! 후회막심)

 내 삶을 단순화해본다. 30대 중반인 내 삶의 키워드는 '신앙', '건강', '관계'다. 그 키워드를 중심으로 내 삶의 루틴을 짜 본다. '집-직장-집안일-운동-가끔 약속'으로 이루어진 삶이 단순해서 무료하게 느껴지기보단 안정감을 준다. 집안일을 깔끔하게 마치고 정돈된 환경에서 찾아오는 편안함. 운동을 하고 나서 느껴지는 가뿐한 몸. 쫓기지 않는 시간 속에서 깃드는 너그러운 마음들. 하나님을 향한 갈망들. 택이와 손을 잡고 거니는 밤의 산책길. 풀벌레 소리, 얕은 풀내음, 선선한 바람. 벗들과 주고받는 소중한 마음들. 마음을 트이게 하는 웃음. 충분한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