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를 보지라 부를 수 있었다.

2020. 3. 26. 11:36세번째 서랍: 일상 이야기

인천페미니즘페스티벌에 다녀왔다.

여러 부스들 중에 형형색색의 다양한 월경컵을 쫘-악 펼쳐놓은 부스가 가장 인상 깊었다.

월경컵을 사용하기도 했고 여전히 월경컵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는 나는 자연스레 셀러분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나: 저는 메루나 컵을 처음에 사용했는데 작아서 이번에는 새로 티움 컵을 샀어요. 그런데 티움컵은 빼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ㅠㅠ 빼는데 10분 넘게 걸리니 다음번엔 끼기가 무서워서 못 끼게 되었어요..

 

셀러: 그럴 때에는 손가락으로 컵을 더 꾹 눌러서 이런 식으로(손으로 컵을 누르는 모양을 보여줌) 빼보세요! 

 

나: 제가 최근에 신우신염에 걸렸는데 생리컵을 제대로 세척하지 않고 끼워서 걸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셀러: 생리컵 소독은 어떤 식으로 하시나요?

 

나: 전자레인지에 2분 정도 돌려요

 

셀러: 가장 좋은 건 끓는 물에 소독하는 거니 그 방법을 사용해 보세요. 그리고 생리컵을 바꾼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생리컵을 통해 감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은 것 같아요. (왠지 안심) 

그리고 보지를 닦을 때 샤워기로 바로 닦으시나요? 그렇게 닦으면 세균이 더 튀어서 좋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샤워기를 배에다 대고 흘러내리는 물로 보지를 닦는 게 좋대요.

 

나: (!!!!!)

 

보지라는 말이 이렇게 공공장소에서, 대낮에, 은밀하거나 비밀스럽지 않게, 야하지 않게, 그냥 ‘얼굴’을 말하듯이 아무렇지 않은 뉘앙스로 이야기되다니! 나는 늘 들어왔던 말인 것처럼 최대한 아무 내색 없이 자연스럽게 ‘네~ 보지를~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 

 

내 인생력에 있어서 그동안 보지를 보지라 부르지 못하고 ‘소중이’, ‘거기’ 등으로 시원치 않게 불렀던 시대는 가고 이제 보지를 ‘보지’라 정확하게 불러줄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같이 인페페에 왔던 쌤과 함께 근처 카페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경험한 보지 이야기를 나도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전달해보았다. (적용력 갑)

 

“아까 월경컵 파는 곳에서 이런 이야기도 들었어요. 보지를 닦을 때 샤워기의 물줄기가 바로 보지로 가게 닦으면 세균이 튀어서 안 좋대요. 배에 물줄기를 가게 해서 흘러내리는 물로 닦는 게 좋대요.”

 

보지를 보지라 말할 때의 희열이란! 

마치 노브라로 자유롭게 다녔던 세부에서 느꼈던 해방감과 비슷했다.

 

앞으로도 보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다면 나는 최대한 망설이지 않고 보지를 보지라고 속 시원하게 말할 것이다. (아니면 음순이라는 보다 부드럽고 고상한 공식 네임도 있다.)

시작이 어렵지 한 번 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19.07.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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