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 by.김혼비

2022. 1. 10. 00:06네번째 서랍: 문화 이야기/책을 읽다

아무튼술책
아무튼 술/ 김혼비

'아무튼, 술'은 겨울 책방의 김겨울님이 추천하셔서 보게 된 책이다. 

추천 기준은 단 하나, '재미있는가' 

김혼비 작가와 개그코드가 맞다면 분명 빵빵 터지며 볼 수 있는 책이라 하셨고, 나는 김혼비 작가와 개그코드가 상당히 잘 맞는 사람이었고.... (김혼비 작가식으로 이야기해보았다...)

의아하고 기묘하며 황당한 상황에서 말줄임표를 사용하며 담담하고 아련하게 문장을 끝내는 화법에 매료되었다....

말줄임표 남용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ㅋㅋㅋ

 

'아무튼, 술'은 김혼비 작가가 술과 함께한 인생 에피소드들이 담긴 책이다.(아주 일부)

짧은 꼭지들이어서 하나 하나 틈나는 대로 읽기 좋지만 읽다보면 다음 에피소드도 못참고 읽어버리게 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을 스포할 수는 없지만 '술과 함께라면 노잼인생도 유잼인생으로 바뀌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까지 들게한다. 하지만 술을 재미있게 마실 수 있는 건, 재미있는 사람들과 함께여서일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곁들이는 술은 새벽까지 지치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부스터샷이 되어주는 것 같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은 스포방지를 위해 넣어두고, 아래는 생각할 거리가 있었던 구절이다.

 

마음에 담는 문장들


 

나에게 있어 가늘고 길게 가는 관계는 '지인'이다. 가느라달 거라면 뭣 하러 친구가 되며, 가느다란 친구 관계가 굳이 길어야 할 이유도 잘 모르겠다. 그런 경우 상대도 나도 너무 사소해서, 너무 유치해서, 너무 쿨하지 못해서, 너무 쑥쓰러워서, 혹시 기분 상할까 봐, 관계가 틀어질까 봐, 어색해질까 봐 등등의 이유로 차마 맨 정신으로 할 수 없어 속에 담아두는 말들이 쌓여갔고, 쌓이는 말들 사이의 여백을 (틀림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추측으로 메워가다가 어느샌가 전혀 다른 곳으로 서로를 데려갔다. 분명 10년 가까이 알았는데 서로에 관해 잘 안다고 '추측'했지만 지나고 보면 잘 몰랐다. 지나고 보면 상대도 나도 적정선 안에서 '나이스'했다. 지나고 보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항상 술을 마시고 꺼내놓았던 말들보다 술 없이 미처 꺼내지 못한 말들을 훨씬 후회스러워하는 쪽이었다. 누군가 술기운을 빌려 나에게 꺼내놓는 말들을 소중히 담아놓는 쪽이었다. 때로는 그 말이 우리를 나쁜 방향으로 이끌고 갈 때도 있지만, 어쨌든 '나이스'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게 고여 있는 것보다는 어느 쪽으로라도 흘러가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167p

 

나는 예배모임을 하며 꼭 술이 있어야만 속엣말을 다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예배모임에서만 사람들을 만나는 건 아니니..ㅎㅎ 누군가에게는 술의 힘을 빌려야 이야기할 수 있는 말도 있다는 걸 알겠다. 개인적으론 술을 마신 상태이든, 마시지 않은 상태이든 '진심을 잘 전달하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자꾸 '나이스'한 모습을 지키려고 하는 면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는 분위기에서 좀 뚝딱댄달까...? 몇 년 전 친구 두 명과 함께 베트남 여행을 갔다. 마지막 날 밤에 와인 한 잔 하며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나는 와인 몇 잔과 함께 꿈나라로 떠나며 홀로 여행을 마무리 지었다던가....(다음날 무슨 얘기 나눴는지 친구들이 얼추 얘기해줬지만 생생한 현장을 함께 하지 못해 너무 아쉬웠다 정말...) 작년에 지히랑 영월 여행 갔을 때에도 마지막 날 밤에 지히랑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지히가 "영월 여행 어땠어?"라고 물어봤는데 갑자기 <영월 여행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평하고 앞으로의 우정을 돈독하게 하기 위한 적절한 대답을 하시오.> 라고 압박면접을 받은 사람처럼 긴장하게 된다던가 하는 식이다.ㅋㅋㅋㅋㅋ오해하지 마시라. 여행 마지막 날에 허심탄회한 이야기 나누는 거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허심탄회한 이야기 나누는 거 좋아한다... 자연스럽게 되는 과정이 어려울 뿐... 

 

"진탕 마시고 속엣말 다 편하게 털어놓자" "취한 김에 비밀 하나씩만 이야기해봐" 같은, 조직된 '허심탄회주의'를 강요하는 술자리도 질색이다. 나는 아직 준비도 안 됐고, 딱히 당신과 그럴 생각이 없으며, 그럴 만한 관계도 아닌데 따옴표를 확 열고 들어오면 "제가 털어놓을 속엣말은요... 당장 집에 가고 싶어요. " 말고는 할 말이 없어진다. 백지 위에서 쓱쓱 같이 뒹굴며 같이 뭉특해지며 같이 허술해져가며 마음이 열리고 말이 열리는 건 일부러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상태'이다.
-169p

술자리는 갑자기 진심으로 훅 내달리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 진심을 내보일만한 사이인지 알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술자리 밖에서 좋았던 사람은 술자리에서 더 좋을 가능성이 높겠다. '조직된 허심탄회주의'. 특히 직장에서 만나는 사이에서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취향의 확장과 감당의 깜냥에 관해 생각했다. 그동안 돈이 많이 나가는 취미를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던 데다가, 취향이라는 것은 경험, 사유, 지식, 능력, 근육량과 함께 확장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나에게는 새로운 종류의 고민이었다.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이 취향의 세계에서 지속적 만족을 얻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지속적 만족이 불가능하다면 그 반작용으로 생길 지속적 결핍감에 대처할 수 있는가. 취향 확장비(혹은 유지비)를 나의 노동력과 시간으로 환산했을 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가. 취향 확장비로 얻을 수 있는 다른 것들과 비교했을 때,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게 확실한가.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너는 취향의 확장을 감당할 깜냥이 되는가!
-135p


와인의 세계에서 한 병에 300만원짜리 와인을 맛보고 나서 작가가 고민했던 부분이다. 우리 같은 월급쟁이들은 누구나 이런 지점을 맞이하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때에 도움이 될 이야기였다.

 

혹시 나처럼 현실적인 여건이 여의치 않고 통이 크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어떤 세계를 피워보지 못하고 축소해버리고 마는 것에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만큼은 꼭 말해주고 싶다. 살면서 그런 축소와 확장의 갈림길에 몇 번이고 놓이다보니, 축소가 꼭 확장의 반대말만은 아닌 경우들을 보게 되었다. 때로는 한 세계의 축소가 다른 세계의 확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축소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확장이 돌발적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축소해야 할 세계와 대비를 이뤄 확장해야 할 세계가 더 또렷이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내게는 '모자란 한 잔'보다 '모자란 하루'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든지, 그래서 모자란 한 잔을 얻기 위해 쓸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모자란 하루들을 늘려가는 데 잘 쓰게 되었다든지, 같은 가능성.
아니, 뭐 그렇게 안 이어지면 또 어떤가. 
-p137

 

나도 오늘부터 김혼비 작가 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