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22. 16:24ㆍ네번째 서랍: 문화 이야기/책을 읽다
내가 애정하는 작가 이슬아의 2021년 11월 신간 인터뷰집 <창작과 농담>을 읽었다. 이슬아의 첫 번째 인터뷰집을 읽고 쓴 글도 있었다.
▼ 이슬아 작가의 첫 번째 인터뷰집. 깨끗한 존경을 읽고 나서.
<창작과 농담>과 함께 <새 마음으로>라는 인터뷰집도 동시에 세상에 나온 것을 보며 여전히 성실하게 듣고, 읽고, 쓰고 있는 작가의 삶이 느껴졌다. 2년이란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질텐데 같은 밀도로 시간을 살아내진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2년 동안 무엇을 했고, 무엇이 달라졌는지 자신에게 되묻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인터뷰어가 있다. 한 명은 이슬아, 다른 한 명은 재재다. 재재는 <문명특급>이라는 백만명이 넘는 유튜브 채널의 PD겸 진행자인 사람이다. 둘의 공통점은 카메라와 기록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인터뷰라는 상황 속에서도 인터뷰이들의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내서 우리에게 맛보여 준다는 점이다. 보여지는 모습으로 소비되고 납작하게 그려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바람을 훅훅 불어넣어서 그 사람의 입체적인 면을 다시 살려서 보여준다. 그래서 아무리 수백 수천 번의 인터뷰를 해왔던 사람일지라도 그들의 인터뷰를 통해 보는 인터뷰이는 새롭게 다가온다. 내 곁에 머무는 아는 얼굴의 사람처럼, 따듯한 온기를 간직한 채로.
그런 인터뷰어가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에겐 축복이다. 우리가 결코 쉽게 탐색하기 어려운 다른 사람의 우주를 여행하게 해주는 일이니까. 지혜롭고 명민한 이슬아의 이번 인터뷰집도 내가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다른 별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 책이었다. 반짝이는 무엇인가도 한 두 개 마음 속에 기념품으로 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즐거운 여행이었다. 책에 나온 사람들은 밴드<새소년>의 황소윤,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저자 김규진, <장기하와 얼굴들>의 장기하,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의 감독 김초희, 주연 배우 강말금, <혁오>의 오혁이다.
마음에 담는 문장들
이슬아X김규진
김규진: 둘 다 외국에서 교육을 받았는데요. 미국식 커리큘럼에 따라 토론을 진짜 많이 했어요. 토론할 때마다 마음이 상하면 버틸 수 없단 말이에요. 나랑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그냥 지내는 것을 청소년기 때 배운 게 도움이 되지 않나 싶어요.
청소년기 때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고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나의 모습...... 최근에 가장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 교회 안에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이 다름을 뛰어넘어 함께 할 것인가,이기에. (저번주 목사님의 설교 중 보수적 성교육의 필요성과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택이가 진단 내려준 내 문제의 원인은 '내 생각이 옳다고 지나치게 확신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 말이 옳은데? 근데 왜 이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 답답하고 화가 난다! 이렇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니까 상대방도 내게 그런 생각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레 화도 난다. 왜 나는 틀렸다고 생각해? 왜 내 생각을 바꾸려고 해? 라고. 그냥 서로 자신의 생각이 다 옳지 않을 수 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달라도 괜찮다. 일부의 생각이 다르다고 우리가 적대적인 관계로 변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다르게 생각하는 점도 있지만 같게 생각하는 점도 있다. 그런 생각을 되뇌인다. 김규진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레즈비언 유부녀로서 커밍아웃을 하면서도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당사자도 이런 여유가 있는데...나는 너무 내 의에 취해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이슬아X장기하
장기하: <초심>이라는 노래를 만들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죠. 그 노래 발매하고 제목을 영어로 번역할 일이 있어서 고민을 해봤어요. 그런데 초심이라는 말은, 영어로 번역할 수가 없더라구요. 저에게 영어 회화를 가르쳐주는 미국인 친구랑 둘이서 한참을 고민해봤는데도 모르겠는 거예요. 왜냐하면 영미권에서는 초심을 지키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없대요. 처음 가졌던 생각이 더 좋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거죠. 그런 생각이 어느 문화권에서나 절대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내가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내가 나고 자란 문화의 영향이 참 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문장이었다. 초심은 항상 지켜나가야 할 것으로 여겨졌는데. 절대적이라고 여겨졌던 개념 조차도 멀리 떨어져서 새로운 시각으로 보면 다르게 보일 수 있구나.
저녁 내내 그와 함께 목적지 없이 산책한 뒤 헤어진 기분이다. 돌아선 장기하는 산뜻하게 초심을 잃고 간다. 처음의 마음 말고 다음의 마음을 향해 간다. 그가 다음의 마음으로 만들 노래를 나는 기다리고 있다.
다음의 마음이란 말이 좋아서 여러 번 되뇌었다. 초심을 잃고 간다. 처음의 마음 말고 다음의 마음을 향해 간다. 다음의 마음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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