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밀라논나 이야기 by.장명숙

2022. 1. 15. 23:54네번째 서랍: 문화 이야기/책을 읽다

밀라논나_책_표지
밀라논나 이야기/ 장명숙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밀라논나 이야기'는 도서관에서 새로 들어온 책 코너를 기웃거리다가 빌려온 책이다. 밀라논나는 유튜브에서 한 번 정도 스치듯 본 적이 있는 분이었다. '패션업계에서 유명하신 백발의 할머니' 정도의 이미지만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그 분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관상은 과학이다

 

나도 관상 이즈 사이언스파로서 사람이 나이 마흔을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에 심히 공감하는 바다. 그런 면에서 이제 일흔의 백발이 형형한 할머니의 얼굴에서 나는 이미 할머니 믿습니다, 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논나할머니는 우리나라에서 이탈리아 패션 유학을 처음으로 하신 분이며 한국에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들을 들여오신 분이라고 한다. 엄청난 스펙의 할머니이시지만 책을 통해 만난 할머니는 우리네 할머니처럼 따뜻한 정을 주시는 친근함이 느껴졌다. 더불어 명품과 가까이하시는 삶을 살아오셨지만 오히려 검소하고, 소박하지만 기품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주신다. 이 세상을 떠날 날을 생각하시며 자신의 생을 차근차근 비워내고, 단정하게 정리해 가시는 모습도 너무 본받고 싶은 모습이었다. 

 

최고의 명품은 스스로가 명품이 되는 것

 

밀라논나는 본인이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를 들여온 장본인으로서 현 시대의 사람들이 명품을 사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버리고, 자신을 존중하는 삶을 버리는 경우를 보며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기에 더 밀라논나로서 사람들에게 내가 소유한 명품이 나를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가가 나를 빛나게 하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시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용돈이 꽤 모였길래 한 평생 명품백은 커녕 몇 십만원 짜리 브랜드 가방이라곤 들어본 적이 없으신 엄마께 명품백 하나를 선물해 드렸다. 우리 집은 가난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넉넉한 집은 아니었다. 항상 알뜰살뜰 살림하는 엄마의 손에 들린 건 이것저것 편하게 담기 좋은 에코백이었던 것 같다. 그런 엄마를 닮아서 나도 에코백 마니아라 딱히 내 가방에도 남의 가방에도 큰 관심을 두진 않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엄마 손에 들린 가방이 눈에 들어왔고, 엄마에게도 좋은 가방 하나쯤은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엄마는 명품백이라니? 갑작스런 이야기에 놀라셨지만 엄청 설레하시는게 느껴졌다. 매장에 가서도 처음엔 이런 걸 이렇게 막 만져도 되나.. 이런 걸 이렇게 매봐도 되나... 하시더니 곧 적응하시곤 본인의 취향도 이야기하시는 모습이 재미 포인트기도 했다. 엄마랑 인생에서 이런 추억을 만들었다는 게 기뻤다. 내가 이렇게 기쁘게 선물할 수 있었던 건 엄마가 내 마음 속에서 명품 엄마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명품 가방을 들어서 명품 엄마가 된 것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또 엄마에게 명품 가방을 선물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다음 기회는 아빠에게로 넘긴다.) 우리가 돈이 넉넉하다면야 질 좋은 물건을 사는데 더 쓸 수야 있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굳이 명품을 여러 개 구매하는데 돈을 써야한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이다. 만족감이 큰 소비는 합리적인 가격(무조건 저렴한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비싸도 잘 사용하면 합리적인 가격으로 생각될 수 있다.)으로 구매한 물건을 유용하게 자주 사용하며 사용할 때마다 소소한 기쁨과 만족이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건 정말 잘 산 것 같아!', '볼 때마다 정말 마음에 들어'와 같은 생각이 들게 하는. 그렇게 삶에 가까이 하게 된 물건은 물건에 내 삶의 스토리가 덧입혀지게 되고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명품이 된다. 밀라논나의 삶 속에서도 그런 물건들이 보인다. 할머니께서 물려주신 그릇, 아버지의 흰 와이셔츠, 어머니께서 혼수로 선물해주신 그릇, 사은품으로 얻은 내가 좋아하는 오렌지 색의 가위 등... 사용할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취향과 추억이 느껴진다. 나도 그런 그런 물건들을 하나 둘 만들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노년기

 

살아가는 동안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 규칙적인 삶을 살아가시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 이 부분은 유튜브 채널에서 영상으로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 드리시는 모습, 스트레칭 하시는 모습, 적당히 건강한 식사+흑맥주 한 잔 하시는 모습, 업무와 유튜브 댓글 보시는 모습, 가족과 나누는 통화까지. 평범한 일상이지만 규칙적이고 균형잡힌 일상이 느껴졌다. 나도 내 삶의 건강한 루틴을 만들어나가야지..! 밀라논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다짐을 자꾸만 하게 된다.ㅎㅎ

 

▼밀라논나의 하루를 엿볼 수 있는 나이트 루틴 영상

 

책에서 추가로 볼 수 있었던 부분은 꾸준히 직접 아이들 곁에 찾아가 봉사활동을 하고 계시는 것이었다. 아들이 갑작스런 뇌출혈로 쓰러지며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 아들을 살려달라고,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했던 게 시작이었다. 그렇게 시작됐던 봉사는 밀라논나의 삶을 더욱 의미있고 충만하게 해주는 일이 되었다. 사람이 노년기에 들어서서 가장 힘든 게 외로움과 내가 사회에서 무가치한 존재라는 생각이 아닐까. 노후의 경제를 어떻게 준비할까를 고민하는 이야기는 많지만 노후의 마음을 어떻게 준비할까에 대해서 고민하는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많이 적은 것 같다. 봉사는 세상에도 이롭지만 내 삶에도 정말 이로운 일이라는 걸 느낀다. 물론 나한테 이득이 되니까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봉사가 나를 힘들게 한다고 느낄 때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먼저 구하는 마음으로 해야 내가 높아지지 않고, 지치지 않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담는 문장들

 

내가 뭘 줬다고 이런 사랑을 보내주시나...

가슴 깊은 곳에서 감동이 밀려와 깊은숨을 내쉬었다.

25년간 봉사를 하면서 얻은 깨달음이 있다.

어떤 돈은 시류에 휩쓸려 쉽게 사라지지만

어떤 돈은 가까운 누군가에게 힘을 준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껴 모은 돈으로

누군가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

봉사로 충만해지는 내 삶이 나는 참 좋다.

(140p)


이렇게 보면 나는 천성적으로도 체질적으로도 럭셔리한 삶을 누릴 운명이 아니다. 실제로도 럭셔리한 삶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초라하고 구식이라는 평가를 받아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내 공간이다. 꼭 필요한 검박한 물건들만 놓인 쾌적한 내 집이다. 그 안에서 안분지족하며 내 시간을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이른 바 '럭셔리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럭셔리는 나와 거리가 멀다. 그런데 어느 날 럭셔리라는 단어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기사를 발견하였다. 프랑스 국적의 세계적인 조향사 장 클로드 엘레나의 인터뷰를 읽게 되었다. 그는 럭셔리에 대한 정의를 달리했다.

"진정으로 럭셔리한 삶은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다. 럭셔리는 소유가 아니라 공유다. 소중한 사람과 즐거운 시간과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만들며, 세상과 내가 조화를 이루는 삶이 럭셔리라면 내 삶도 럭셔리의 정점에 있겠다. 오지랖이 넓어서일까. 나처럼 내 것, 내 시간, 내 물품을 나눠주고 싶어서 안달하는 부류도 흔치 않은 듯하다. 

 

오래전부터 좋아하는 단어가 있다. 

'조촐하다'

아담하고, 깨끗하고, 행동이 난잡하지 않고 깔끔하고, 얌전하다는 뜻이겠다. 

조촐한 삶이 바로 내가 지향하는 삶이다. 

황금 깔린 길이 아니라 

자연의 냄새가 나는 길이 내가 추구하는 길이다.

복잡하고 호화로운 삶이 아니라

단순하되 맵시 있는 삶이 내가 원하는 삶이다.

(174-175p)


인간이 인생 여정의 고비를 넘길 때, 자신이 믿고 숭앙하는 신앙이 있다면 정말 큰 위안이 된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이들에게 종교를 가져보라고 권한다. 나쁜 문화나 태도를 강요하는 종교가 아니라면 좋다. 자신의 체질에 맞는 종교를 갖길 바란다. 신앙을 가진 피조물이 자기 신앙에 맞게 살아간다면 세상은 좀 더 따뜻해지고 인간다워진다고 나는 믿는다. 

 

신앙이 있으면 욕심도 정리가 되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도 알게 된다. 무엇보다 죽음이 두렵지만은 않다. 억지로라도 다른 세상이 있으리라 믿고, 다른 세상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여기서 조금은 잘 살아보려 노력하게 된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프랑스의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절친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하느님을 본 적은 없네. 다만 하느님이 계신다고 믿으며 사는 삶이 그렇지 않은 삶보다는 훨씬 가치 있을 걸세."

 

나이가 들어갈수록 신앙을 갖기로 한 내 선택이 참 잘한 일이었다고, 내게 칭찬을 해주고 싶다.

(301-30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