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등산

2020. 3. 27. 15:32세번째 서랍: 일상 이야기

H와 함께 아차산 등산을 했다.

미세먼지가 심해 시야가 흐린게 아쉬웠지만 날씨는 따스했다.

코로나로 거의 집에서만 있다보니 겨울이 끝난 건지, 봄이 온 건지 알기 어려웠다.

밖에 나오니 느껴지는 훈훈한 공기, 길 섶에 보이는 여린 새 잎들, 몽우리를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꽃.

그리고 이미 만개한 목련까지. 아, 이미 봄은 와있었구나.

사계절 중 가장 아끼는 계절, 봄. 언제나 너무 빨리 가버린다고 느꼈지만 올해는 유독 더 짧은 만남인 것 같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봄의 풍경들, 기운들을 꾹꾹 눌러담아 느끼고 있다. 

 

예쁘게 핀 벚꽃 

 

다른 사람들은 등산을 마치고 내려와 먹는 꿀맛같은 점심. 우리는 먼저 먹고 등산을 시작했다.

H는 보통 공복에 가벼운 몸으로 운동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공복엔 어떤 일도 불가능하다(....)

나를 배려해준 H 덕분에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출발할 수 있었다.

우리는 동태와 곤이, 이리가 섞여있는 섞어탕을 먹었다. 

곤이와 이리가 무엇인가 매번 헷갈려서 검색해보았다.

-곤이: 우리가 흔히 먹는 명란젓과 같은 암컷의 알집.

-이리: 꼬불꼬불 뇌모양으로 주름지고 하얗게 생긴 것. 수컷의 정자를 생산하는 정소 덩어리.

모르는 게 약이다, 라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게 아닐까... 

식욕이 약간 감퇴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양푼이 바닥을 보일 때쯤 남은 건 오직 동태살 뿐...^^

다음엔 곤이와 이리만 들어있는 걸 시켜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다양푼이동태탕 광진광장점

 

아차산으로 입구로 가는 길은 오래된 주택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좁은 골목길을 지나간다.

묘했다. 천호대교를 지나오며 바라다본 한강에는 저 멀리 우뚝 솟은 롯데타워가 보였다.

그런데 다리를 건너 조금 들어왔을 뿐인데 이 동네는 다른 세계다. 

오래된 서울 동네. 골목길마다 그려진 아기자기한 벽화들. 작은 가게들. 정겨웠다.

 

아기자기한 벽화들

 

봄의 풍경. 보송보송 털이 오른 가지들. 망울망울 꽃을 틔운 가지들.

계절이 바뀌면 털갈이를 하는 동물처럼, 나무도 계절을 온 몸으로 맞는다.

사시사철 푸른 나무와 이제 막 깨어나는 나무들의 어우러짐. 봄의 역동.

 

보송보송한 가지들

 

아차산은 볼거리가 많다. 처음에는 공원을 내려다보며 입구까지 걷는다.

아차산에 들어서면 줄기가 멋드러지게 구부러진 소나무 군락이 반긴다. 

갑자기 동양화의 한 장면에 내가 들어온 것 같다. 시조라도 한 수 읊어야 할 것 같은 느낌. 

 

구불구불한 줄기가 멋진 소나무

완만한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금새 풍경이 바뀐다. 

조금 올라갔을 뿐인데 산은 관대하게도 멋진 경치를 보여준다.

내가 갔던 산들 중에 가장 혜자스러운 산이다. 오르긴 엄~청 힘들고 풍경은 보잘 것 없는 산도 있을 거다. 

하지만 아차산은 조금만 올라도 수고했다며 풍경 선물을 한가득 해주는 산이었다. 

 

처음으로 보이는 풍경

 

산을 오르다보니 너무 더워서 입고 갔던 기모 후드티를 벗고 나시 차림으로 산행을 했다. 

파격적인 차림새에 사람들의 눈이 신경쓰이기도 했지만 우리 동네는 아니니까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시 차림이 뭐 어때서. 그냥 봄+나시의 조합이 낯설 뿐이지. 지금 몸의 온도엔 나시가 딱이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지나가던 아주머니 한 분이 '너무 시원하겠다.'라며 한마디 던지셨다.

아주머니의 오지랖이 고마웠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더웠는데 신기하게도 그늘에 앉아 땀을 식히니 다시 서늘해진다. 

잠시 땀을 식히며 H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H의 가족 이야기를 들으며, 인생이란게 좁혀서 보면 제각각이지만 넓게 보면 비슷하단 생각을 했다.

노화, 약해짐, 죽음.. 우리 모두 앞에 놓여진 길이었다.

 

내려오는 길 마크라메를 만들기 위해 나뭇가지를 주웠다. 

그런데 내려가다가 자꾸만 어딘가에 부딪혀 나뭇가지를 부러뜨렸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처럼 나뭇가지를 흘리며 내려왔다.

다정한 H가 나뭇가지를 가방에 넣어주었다. 

가방에 차마 들어가지 않았던 긴 나뭇가지는 손에 들었다. 

등산을 마치고 내려와 당을 보충하기 위해 들린 공차에서도 나는 기다란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 나타난 자연인이 된 느낌이었다. 웃음이 났다.

 

나뭇가지...소중해....!

 

당을 보충하기가 무섭게 저녁 먹을 궁리를 했다. 

어떤 메뉴가 좋을지 신중하게 고민하던 우리는 고기를 먹기로 했다. 

구워먹는 고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삼겹살과 목살 돼지껍데기가 입 속에서 어우러져 춤을 췄다. 

옆 테이블 손님이 바뀔 때까지 우리는 야무지게 볶음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다리미 삼겹살 천호점

친구가 집에서 커피 한 잔 입가심하고 가라고 했다. 

암, 커피 배는 따로 있지. 

커피 한 잔 하며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벌써 10시다. 

그리고 낯선 등산의 후유증인지 몰려오는 졸음. 

나는 졸음을 잘 못참는다. 커피 카페인은 나에겐 물이나 마찬가지. 이대로 운전하는 건 위험하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나 오늘 외박해야 할 것 같아..

전화를 끊고 H에게 말했다.

아까 술 먹을 걸. 

완벽한 하루에 단 하나의 오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