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의 기억

2020. 3. 28. 22:36세번째 서랍: 일상 이야기

초등학생 때 나는 여름 방학만 되면 외할머니 댁에 내려갔다. 외가 쪽에는 내 또래 사촌들이 많았다. 우리는 사촌들 중 누군가의 부모님이 모는 봉고차를 타고 몇몇은 의자에 앉았고 몇몇은 돗자리를 깐 바닥에 앉았다. 지나가는 차를 추월하는 걸 경주에서 이긴 양 기뻐하기도 하면서 고속도로를 달렸다. 게임 이야기와 만화책 이야기, 노래 부르기가 이어지다 보면 어느새 전라남도 무안(지금은 박나래의 고향으로 유명한) 외할머니댁에 도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하며 방학 동안 자녀들을 돌보기 힘들었을 부모님들이 합심하여(?) 외할머니께 우리를 보내버린 것이다. (외할머니께 잘해야겠다..) 외할머니의 고충을 생각해볼 만큼 생각이 자라 있지 않을 때였다. 그저 머릿속에서는 '오늘은 무슨 (사고를 칠...) 일을 하며 놀까!'란 생각뿐이었다.

 

하루는 황소개구리를 잡으러 가겠다고 온 동네 저수지며 수로를 뒤졌다. 하루는 마당을 파서 우물을 만들겠다며 마당을 파헤쳤다. 가스레인지는 위험해서 쓸 수 없으니 마당에 있는 화분에 신문지를 넣고 불을 피워 가짜 가스레인지를 만들었다.(더 위험함) 그렇게 놀면서 서로 싸우기도 엄청 싸웠다. 사촌오빠가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불을 껐다 켜는 장난을 계속하다 엄청 뚜드려 맞고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워 울었던 기억도 있다. 

 

마당 한 켠에 널린 행주 ⓒ정오의달

 

이때의 추억을 생각하면 외삼촌을 빼놓을 수 없다. 외삼촌은 외가의 8남매 중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때는 자식들을 많이 낳는 때였다고 해도, 7번째가 외삼촌이었고 8번째는 막내 이모였다. 8번째 딸을 끝으로 외할머니의 기나긴 출산이 끝난 것으로 보아 아들을 얻기 위해 외할머니가 감내했을 출산의 고통이 눈에 선연했다. 그렇게 귀하게 태어난 아들이었지만 그 아들도 가난 앞에서는 혹독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외삼촌은 항상 그을린 피부에 장난기 가득한 눈꼬리 그리고 구성진 사투리로 조카들에게 장난을 걸곤 했다. '아야~ 뭣헌다냐~?'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이었다. 처마 밑 마당에 두꺼비가 나왔다. 흔히 보던 개구리와는 너무 다르게 생겼던 두꺼비가 신기했다. 바위와 모래가 섞인 듯한 황갈색의 우둘투둘하고 거친 피부. 꼼짝 않고 앉아있는 두꺼비의 모습. 호기심 많은 나는 가까이 가서 보고 싶었다. 그때 외삼촌이 말했다. '아야, 두꺼비 만지면 두꺼비처럼 피부가 우둘투둘 해져분다?' 만지지 않았지만 만졌을 때의 거치고 우둘투둘한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 손등이 우둘투둘한 두꺼비 피부로 변하는 상상이 이어졌다. 나는 껌벅 속아 넘어가 겁을 먹고 말았다. 두꺼비 곁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화투를 우리에게 처음 가르쳐 준 것도 외삼촌이었다. 명절 때면 어른들이 모여 화투 치는 걸 구경했다. 조금은 칙칙한 빨강이 어른의 것이라는 느낌을 풍기던 화투장. 그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어른의 세계에 발을 담근 것 같아 가슴이 설렜다. 어른들이 하지 않는 틈을 타 엉터리로 화투 치는 걸 흉내 냈을 때였나, 외삼촌이 보다 못했는지 우리에게 화투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세상 어떤 공부보다 재밌었던 공부였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외삼촌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새겨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유레카!'를 외친 마음으로 화투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어른들이 '너네 지금 뭐하냐?!' 놀라서 물으면 '외삼촌이 가르쳐줬어요!'라고 말하며 외삼촌을 든든한 방패막이로 삼곤 했다. 외삼촌은 어른들의 눈초리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서 든든했다. 어른이지만 어른 같지 않은 어른. 장난도 곧잘 치고 우리에게 어른의 세계를 살짝씩 맛 보여 주며 우리의 어린 시절을 풍요롭게 해 주었던 사람이다. 

 

마당 한 귀퉁이에서 벌어졌던 작당모의들 ⓒ정오의달

 

공포영화 비디오를 빌리러 함께 읍내까지 모험을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본 <캔디맨>은 <처키>와 맞먹는 내 인생 공포영화였다. 캔디맨은 거울을 바라보고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세 번 캔디맨을 부르면 나중에 캔디맨이 나타나 자기를 부른 사람을 죽이는 영화였다. 시골집에는 마을 회관 같은 곳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한쪽 벽면을 크게 채우는 광고 문구가 새겨진 거울이 있었다. 나는 너무 무서웠고 동시에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영문을 모르는 동생에게 거울을 보고 캔디맨을 세 번 말해보라고 했다. 동생은 아무 생각 없이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 캔디맨을 세 번 읊조렸다. 그날 밤 갑자기 캔디맨이 나타나 동생을 죽여버리면 어떡하지. 뒤늦은 후회가 밀려 올라왔다. 호기심에 동생을 팔아버린(?) 나는 나의 인성(...)을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시골집에는 노래방에 가야만 볼 수 있는 노래방 기계가 있었다. 시골에서는 집에서 회갑잔치를 비롯한 각종 행사가 열렸는데 그때 모두의 흥을 돋우기 위해 노래방 기계 한 대쯤은 들일 수 있는 문화였던 것이다. 초등학생들끼리 노래방에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1990년대였다. 그런데 시간제한 없는 공짜 노래방이라니!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별빛이 흐르고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찾아왔지만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나오는 이 없어 슬픈 <아파트>, 야빠빠 야빠빠 웅~묘익천, 야빠빠 야빠빠 돈~익천♪ <란마1/2>같은 본 적 없는 만화 주제가도 노래방 기계를 통해 배웠다. 

 

흙마당은 시멘트로, 오픈형이었던 마루도 변했지만 여전한 마음의 고향 ⓒ정오의달

 

여름이면 마루와 마당을 이어 커다란 모기장을 치고 그 안에서 사촌들과 도도록 누워 잠을 잤다. 무더운 한여름 밤, 얇은 홑이불을 배 위에 얹고 수다를 떨거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깜깜한 밤, 텔레비전 화면만 밝게 빛났는데 언젠가는 텔레비전에서 야한 영화가 나왔다. 옆에서 누군가는 자고 있었지만 나는 깨어있었다. 나 말고도 또 다른 누군가 깨있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야한 영화의 내용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몰래 숨죽여 자는 척하며 화면을 훔쳐보던 그 시절의 내 모습은 지금도 내 마음에서 은은하게 떠오른다.

 

(2020.03.fin.)